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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2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검사의 길

18. 서울행 다시 불발

마산지청에 근무하던 1975년 4월 평소 발표한 논문과 신문에 기고했던 수상.수필 등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법, 주변의 존재』를 펴냈다. 그동안 썼던 글들을 모아 정리해 두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출간한 것이었다.

마산상고 동창들이 마산시청에서 성대하게 열어주었던 출판기념회는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어느덧 마산지청에서 일한 지 2년이 넘었다. 인사 이동의 시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서울로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불안한 마음에 조바심만 났다. 생각다 못해 자력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법무부장관이 주는 우수논문 표창을 받는 것이었다. 당시 법무부장관은 고(故)황산덕(黃山德)씨였다. 黃장관은 대검찰청에서 발간하는 '검찰'이라는 잡지에 게재된 논문 중 한해 동안 가장 우수한 한편을 선정해 직접 시상하고, 수상자를 다음 인사에서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는 제도를 운영했다. 검사들이 수사뿐 아니라 연구에도 몰두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黃장관의 아이디어였다.

내가 서울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수논문 수상자로 선정되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에 '수출자유지역(마산)의 법적 성격'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 대검에 제출했다.

70년대 초반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마산지역은 요즈음 경제용어로 말하면 경제특구라고 할 수 있는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북한산 원자재(原資材)가 제3국을 통해 수출자유지역인 마산에 반입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중앙정보부 등 공안기관이 수시로 소란을 피우기도할 때였다.

우리 기업이 북한에서 직접 제품을 만들어 북한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표시해 우리나라에서 팔고 있는 지금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그런 만큼 '마산'이라는 지역 자체가 경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법률적인 측면에서 연구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내 논문이 그 해 우수 논문으로 선정됐다.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 있던 법무부 장관실에서 표창장과 함께 부상을 받았다. 우수논문으로 선정된 것도 기뻤지만 서울로 올라갈 수 있는 보증수표를 받았다는 사실에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검찰내에서도 김경회 검사의 다음 임지는 서울지검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상 인사 발령이 난 것을 보니 서울지검 본청이 아닌 서울지검 인천지청이 아닌가.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럴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 인사발령 내용을 보아도 분명 서울지검 본청은 아니었다.

법무부장관의 약속 위반이었다. 물론 인사규정에 명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법무부와 대검찰청에서 우수논문 수상자는 본인이 원하는 임지로 보내준다고 공표를 했고 그 전에도 몇몇 수상자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발령을 받았었다.

분통이 터졌다. 검사들 인사를 관장하는 법무부 검찰국 관계자들에게 항의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뒤에 알게된 일이지만 내가 서울검사장에게 항명해 장흥지청으로 좌천됐다가 법무부 서정각(徐廷覺)검찰국장의 배려로 고향인 마산지청으로 옮겨간 사실을 아직까지 못마땅해하던 지휘부의 입김이 있었던 것이다.

마산지청을 관할하는 부산지검 검사장에게 이임 인사를 갔더니 마산에서 인천으로 가는 것을 빗대 "항구에서 항구로 가는구먼"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젊은 검사를 위로해주기는커녕 비꼬는 발언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검사장이 됐나 하는 반발심이 생겼다.

서울지검 인천지청으로 옮겼지만 '한번 윗사람에게 밉보인 것이 오래 가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지청도 서울지검 관할이니 영전시켜 준 것으로 알라는 것은 아니겠지….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마음으로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등 갖가지 상념이 스쳐갔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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