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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류들의 24시] 5. 이탈리아 팔질레리 사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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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패션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요즘 새롭게 '뜨는' 패션 중심지는 북동부 베네토 지방. 베네통과 스테파넬 등 세계적 패션 브랜드들의 본거지가 이곳이다.

세계 남성복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팔질레리'도 베네토의 소도시 비첸차에 본사를 두고 있다. 팔질레리 설립자인 잔프랑코 바리차(64)사장을 만나 후발업체로 출발해 세계 일류로 성장하기까지의 비결을 취재했다.

다른 유명 브랜드를 제쳐두고 국내에는 비교적 덜 소개된 팔질레리에 주목한 이유는 이 회사가 남들과는 다른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잔프랑코 바리차 사장부터가 그렇다.

대부분의 패션업체 설립자들과 달리 그는 디자이너 출신이 아닌 전문 경영인이다. 그러면서도 옷감에서부터 단추에 이르기까지 의상과 관련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장인이다.

한 의류업체의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던 바리차는 1970년 독립해 '포랄(Forall)'이라는 남성복 전문업체를 세웠다.

"사실 모험이었다. 미친 짓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많았다. 의류업계는 아이템 선정을 연속 두번만 잘못해도 망하는 곳이다. 그런데 옷을 팔기만 하던 사람이 직접 만들겠다고 나섰으니…."

세계적인 패션브랜드는 한 디자이너의 의상실이 유명세를 타고 점차 규모가 확장돼 기업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달리 포랄 그룹은 이탈리아 최초로 기업형으로 출발한 업체였다. 바리차 사장을 사로잡은 생각은 오직 한가지, '어떤 옷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옷을 만드는가'였다.품질 최우선주의였던 것이다.

"이름을 내걸 디자이너도 없는 상황에서 남들과 경쟁할 수 있는 무기는 오로지 품질이었다. 처음엔 말못할 고충도 많았다. 상품 기획에서부터 마지막 단추를 달 때까지 생산 전 라인을 일일이 챙겼다. 등뒤로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공연히 간섭한다'는 직원들의 눈총을 수도 없이 받았다."

당시의 에피소드 한가지. 재봉 라인을 돌던 바리차가 바느질 땀수가 느슨한 제품을 발견했다. "누가 박은 것이냐"고 다그치자 10년 경력의 숙련공이 머리를 긁적이며 나섰다. 그를 옆에 앉혀놓고 재봉틀에 직접 앉았다.

재봉질은 처음이라 사용방법을 물어가며 양복 소매를 달았다. 소매달기는 재봉 작업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공정이다. 잘못 박은 것을 뜯고 다시 박기를 수십차례. 퇴근시간을 훨씬 넘긴 오후 10시가 됐지만 주변에 둘러선 기술자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결국 맵시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때부터 사장을 보는 직원들의 눈이 달라졌다.일에 더 정성을 쏟아 주었고, 스스로 박은 것을 다시 뜯어내는 재봉공들도 늘었다."

자신감을 얻은 바리차 사장은 80년 본격적인 고급 남성복 브랜드 팔질레리를 출범시켰다.

당연히 품질 관리를 위한 노력도 배가됐다. 팔질레리 출범 때부터 20년간 바리차 사장과 일해온 마리오(64)작업반장은 "안주머니 속에 튀어나온 실밥까지 검사해야 한다"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바리차 사장도 "명품의 진가는 뒷마무리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며 자랑을 한마디 곁들였다.

"지난해 어떤 파티에 장관 한명이 처음으로 팔질레리를 입고 참석했다. 그는 주변에서 '그 옷 어디 제품이냐'는 감탄을 여러차례 들었다. 더 비싼 옷을 입고도 못들어본 소리였다. 그때부터 그는 우리 단골이 됐다."

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위기는 이탈리아 의류업계에도 치명타였다. 문을 닫는 업체가 속출했고 해고 열풍이 불었다. 너도나도 생산라인을 해외로 이전하기 바빴다. 하지만 바리차 사장은 식구들을 고스란히 배에 태우고 격랑에 맞섰다.

"일류 기술자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파도만 지나고 나면 돈주고도 못구할 사람들인데…. 해외 이전은 생각조차 안했다. 싼 임금은 곧 품질 저하로 이어진다. 그것은 팔질레리를 믿고 구입하는 고객들에 대한 사기다." 바리차 사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세계 최고의 품질'이라는 경영방침이 고객과 해외 바이어의 발목을 붙들어 맸다. 80년 2천5백만달러였던 매출액은 2001년 1억5천만달러로 여섯배가 됐다. 그 중 60%가 세계 30여국으로 수출된다.

팔질레리의 품질은 경쟁업체들도 인정한다.

전체 생산량의 15%는 경쟁업체들의 주문을 받아 만드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이다. 직원 수도 80년 4백명에서 현재 1천1백30명으로 늘었다. 바리차 사장은 이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 "우리는 한 식구"라고 그는 말했다.

사원 복지는 그가 품질 다음으로 신경쓰는 문제다. 본사건물 이웃의 농가를 사들여 개조한 구내식당 역시 최고의 '품질'로 정평이 나 있다. 기자는 취재 중 이곳에서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했는데, 메뉴나 서비스가 고급 레스토랑은 저리가라였다. 정복 차림의 웨이터가 일일이 주문을 받았다. 스테이크에는 적포도주, 생선요리에는 백포도주가 곁들여졌다.

바리차 사장은 요즘도 전 생산라인을 일일이 챙긴다. 과거처럼 제품의 하자를 꼬집는 경우는 드물지만 대신 직원들과 토론을 자주 벌인다. 그래서 이 회사에는 사장에 대한 별도 업무보고가 없다. 사장이 각 부서를 지나갈 때 필요한 이야기를 하면 그뿐이다. 기자와 공장을 둘러볼 때도 이곳 저곳에서 직원들의 건의가 이어져 여러차례 발길을 멈춰야 했다.

헤어지는 악수를 나누며 "의류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구두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비첸차=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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