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정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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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인수(1945~) '정월' 전문

농촌 들녘을 지나는데 춥고 배고프다.

저 노인네 시린 저녁이 내 속에서

등 달 듯 등 달 듯 불을 놓는다.

꽃 같은 불 쪽으로 빈 들판이 몰린다.

거지들 거뭇거뭇 둘러앉은 것 같다.

발싸개 벗어 말리며 언 발 녹이며

구운 논두렁도 맛있겠다.

그 뱃속 깊은 데 실낱 같은 도랑물 소리,

참 남루한, 어두운 기억을 돌아오는데도 피를 맑히는

이 땅의 神(신)이옵신 그리움이여.



시인의 기억 속에는 춥고 배고픈 시절과 그때의 가난한 사람들이 붙어사는 것 같다. 그 시절, 그 사람들을 위해 시인은 기억 속에 뜨거운 불을 지피고 그들의 냄새 나는 발싸개도 말려주고, 빈 논두렁을 고구마처럼 구워 준다. 그것은 남루하고 어두운 기억이지만,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시인의 피는 맑아지고, 그리움으로 늘 춥고 고픈 배는 따뜻하게 채워진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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