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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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검사의 길

14. 장흥을 벗어나다

영등포지청 항명사건으로 장흥지청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만 해도 검사직을 그만두려고 했지만 홍순욱 지청장의 만류로 검찰에 계속 머물게 됐다.

언제 서울로 발령날지 그야말로 앞길이 암담했다.

그러나 조용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내심 3년은 있어야 될 것으로 작정하고 강진에서 귀양생활을 했던 다산(茶山)정약용 선생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단련하기로 했다.

그러던 1973년 4월 법무연수원에 입소해 교육을 받고 있던중 법무부 검찰국장이던 서정각(徐廷覺)검사장의 호출을 받았다.

徐검사장이 연수원에서 특강을 하고 돌아가면서 연수원 김주한(金宙漢)부원장에게 "金검사에게 내 방에 들르라고 전해라"는 지시를 했다는 것이었다.

세종로에 있던 법무부를 찾아가면서도 무슨 일로 검찰국장이 나를 찾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평검사가 검찰에 대한 인사.예산권을 가진 검찰국장과 마주 앉는다는 것은 긴장되면서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자리에 앉자 徐검사장이 "장흥 생활이 고달프고 고생이 많겠다"고 위로했다. 徐검사장은 내가 서울검사장에게 항명(抗命)할 때 서울지검 2차장으로 당시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徐검사장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나를 다독거리면서 "자네가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 일 한번 제대로 해보려다 억울하게 좌천된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알아줄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검찰국장이 된 뒤 金검사를 구제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직은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짐작컨대 나를 좌천시켰던 간부가 아직 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장흥보다 근무여건이 조금 나은 곳에 갈 의향이 있나."

"그곳이 어디입니까."

"경부선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위쪽입니까 저 아래쪽입니까."

그랬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 고향이네"라고 대답했다.

"제 고향인 마산은 정원이 다 차 있어 갈 자리도 없을 텐데요. 그리고 인지수사도 해야 하는데 고향에 가서 어떻게 근무하겠습니까."

徐검사장은 "고향 근무가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 오히려 억울한 고향 사람 있으면 잘 봐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씀했다.

강직하고 깐깐하기로 이름난 徐검사장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뜻밖이었다.

"장흥으로 좌천된 뒤 한때 검사생활을 그만두려고까지 했으나 지금은 마음을 고쳐 먹고 서울로 올라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1년 만에 조금 근무 여건이 낫다고 마산으로 옮기면 서울로 영전하는 데 지장이 있는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귀양살이 시효가 중단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돌하기 짝이 없고 건방지기 한량없는 태도였다.

그렇지만 徐검사장은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내가 검찰국장으로 있는 한 계속 신경을 쓸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徐검사장은 "내가 서울지검 2차장으로 있을 때 金검사가 아무런 잘못없이 좌천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항명일 수는 없고 그런 것을 트집 잡아 오지로 좌천시킨 인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게다가 내가 서울지검에 초임 발령을 받아 徐검사장이 감찰부장을 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사건 기록을 검토시켰더니 깔끔하게 정리해줬던 기억이 난다는 등 나도 잊고 있었던 일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바친다고 했던가.

억울하게 벽지에 쫓겨가 있는 평검사의 사기를 북돋워 주는 검찰국장의 격려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장흥으로 돌아온 이틀 뒤 마산지청으로 발령이 났다.

그동안 나를 위로해주고 등산.낚시.운동 등 여러가지로 고락을 같이한 직원들이 서운함과 축하의 말을 건넸다.

장흥이라는 곳은 울고 왔다 울고 가는 곳이라 하더니 그야말로 인정이 넘쳤다. 그곳에서 보낸 1년은 내 삶에서는 물론 검사로서 일하는 데 있어 값진 기회였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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