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나·허정무의 월드컵 일기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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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에 출전하는 축구 대표팀 허정무 감독의 부인 최미나씨가 중앙일보에 ‘최미나·허정무의 월드컵 일기’를 연재합니다. 스타 연예인-스포츠인 커플로 맺어져 축구 선수·감독의 아내로 겪어야 했던 애환과 보람, 벤치에 남은 선수를 보는 애틋함, 월드컵 대표 선수들, 남편을 향한 진한 사랑과 16강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담하게 풀어나갑니다.

허 감독 가족의 단란한 한때. 오른쪽부터 허 감독과 두 외손자, 큰딸 화란씨, 부인 최미나씨. [최미나씨 제공]

24일 한·일전이 끝나자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욱신욱신 아파왔다. TV를 보며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도 따가웠다. 하도 방안을 뛰어다녀서 온 몸에 땀도 났다. 남편(허정무 축구 월드컵 대표팀 감독)의 축구 경기가 있을 때마다 나는 목욕재계를 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혼자 TV를 본다. 옆에 누가 있으면 경기에 집중하기 힘들고, 마음대로 뛰어다니거나 소리를 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누가 옆에서 나를 본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기 딱 좋을 것이다.

일본전 내내 ‘이 경기가 월드컵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성이 저렇게 통렬한 골을 그리스전에서 터뜨려줬으면. 영리한 박주영이 아르헨티나의 골망도 시원하게 흔들어줬으면. 일본전이 끝나고 밤 12시쯤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수고했다”고 말하자 남편은 “응. 그래. 하하하. 나 이제야 숙소에 들어왔어, 배고프다”고 말하는데, 목소리가 붕붕 떠 있었다. 일본전에서 상당히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내가 남편을 만난 게 벌써 35년 전이다. 1975년 TV ‘가요 올림픽’이라는 프로그램의 MC를 맡고 있을 때 현역 축구 선수이던 남편이 심사위원으로 초대돼 첫 대면을 했다. 78년부터 비밀 연애를 하다가 80년 7월 결혼을 했다.

그때 내 한 달 수입이 300만원, 실업팀 축구선수였던 남편의 수입은 10만원이었다. 사람들은 “왜 허정무와 결혼하느냐”고 많이 물었다. 하지만 남편은 반할 구석이 많은 남자였다. 메르데카컵에 출전하기 위해 말레이시아로 원정갔을 때 남편은 매일 우리 집으로 엽서를 보냈다. 글 솜씨도 유려했고 글씨도 잘 썼다. ‘이 남자에게 이런 면이…’.

게다가 “리어카를 끌더라도 나하고 같이 살자”고 얘기하는 박력까지. 나는 “리어카를 왜 끌어요? 그런 마음이면 우리 노력해서 더 잘 살아요!”라고 답하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때는 몰랐다. 축구 선수의, 트레이너의, 감독의 부인이 이렇게 고달픈 길이 될 줄은. 결혼 첫날부터 내 인생에 축구가 쳐들어왔다. 결혼식 날 남편의 ‘아듀 경기’가 잡혔다. 결혼식이 12시, 남편의 경기가 5시.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허겁지겁 동대문운동장으로 뛰어갔다. 남편도 뛰고, 나도 뛰고. 남편은 운동장에서 뛰고, 나는 신부 화장을 한 채 관중석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결혼식 다음 날부터 5일간 친정에 머물다 네덜란드로 떠났다. 남편의 ‘PSV 에인트호번’ 구단 입단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입단 테스트가 우리의 신혼여행이었던 셈이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한국인이라고는 남편과 나, 딱 둘뿐이었다. 그런데 선수들 몸집이 어찌나 큰지, 우리 남편이 너무 왜소해 보였다. 게다가 남편은 ‘에이스’가 아닌, 그냥 팀의 양념 같은 선수였다. 축구 선수인 남편이 벤치를 지키는 설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운동장에 가면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보다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에게 마음이 더 간다. 이동국 선수도 그중 하나다. 남편한테는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얘기인데, 나는 이동국을 볼 때마다 찡한 마음이 든다. 모두의 축제였던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나는 한국에서 도망을 갔다. 한·일 월드컵 2년 전까지만 해도 대표팀 감독이었던 남편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8강 진출 실패와 그해 아시안컵 결승 진출 실패로 지휘봉을 빼앗겼다. 얼마 후 사령탑은 히딩크 감독에게 돌아갔다. TV 해설자로 나서는 남편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나는 큰딸 화란이가 유학 가 있던 프랑스로 갔다. 이동국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히딩크 감독의 눈 밖에 나 선수 아닌 관중으로 월드컵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괴로웠을까. 2006년 독일월드컵 때도 이동국은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월드컵 직전 부상을 당했고, 축제의 한복판 독일에서 그는 재활에 매달리고 있었다. 당시 독일 한식당에서 우연히 이동국을 만났는데 너무 안쓰러워 눈물이 날 뻔했다.

요즘 이동국을 보면서 나는 ‘이번 월드컵에서는 꼭 한을 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딸들도 같은 마음인지 “이번에는 꼭 이동국 오빠가 골을 넣었으면 좋겠어”라고 한다.

다시 네덜란드 시절 얘기로 돌아가자.

나는 왜소한 남편을 위해 먹는 거라도 잘 먹여서 체력이라도 덩치 큰 유럽 선수들을 따라잡게 하고 싶었다.

우선 마늘을 듬뿍 넣어 닭을 고아 먹였다. 그랬더니 운동장에서 다른 선수들이 “마늘냄새 난다”며 코를 쥐고 난리였단다. 남편은 질세라 “너희도 치즈냄새 지독하거든” 하고 대거리를 했다는데, 그래도 나는 신경이 쓰였다. 다음 날부터는 ‘그래. 이 나라에 적응하자’ 싶어서 통치즈를 사서 깍두기처럼 잘라 먹였다. 세 끼 식사도 무조건 햄, 치즈, 빵을 준비했다. 그렇게 3년을 살았다. 에인트호번 구단에서는 2년 더 계약을 연장하면 시민권을 준다고 했다. 그때 마침 우리나라에 프로축구가 생겼다. 남편이나 나나 가족·친구가 정말 보고 싶었다. 우리는 “한국에 가자. 이 생활 너무 오래됐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짐을 쌌다.

정리=온누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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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대한민국축구국가대표팀 감독

1955년

[現] 윌러스 대표

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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