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왜 한국을 떠나려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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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000년 이후 4년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이 무려 17만2000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나왔다. 미국의 이민연구센터(CIS)가 집계한 숫자다. 1990년대 10년간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의 숫자(18만3000명)에 거의 맞먹는다.

이민을 준비하는 기간이 대략 3년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외환위기가 일어난 97년 이후에 이민을 결심한 사람들이 급증했다는 얘기다. 이 기간 중에 미국 이외의 나라로 이주한 인원까지 합치면 한국을 영구히 떠난 사람은 더 많아진다. 외국에 자녀를 조기유학 보낸 이들도 장기적으로는 잠재적인 이민 대상자들이다. 최근까지도 이민박람회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린 것을 보면 이민을 고려하거나, 준비 중인 사람도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TV 홈쇼핑에선 이민 알선 프로그램이 대박상품으로 꼽힐 정도다.

이들은 왜 정든 고국을 등지고 물 설고 낯선 이국 땅으로 떠나려 하는가. 입시 지옥과 살인적인 사교육비를 견디다 못해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내에서 일자리를 못 구하거나 사업이 어려워지자 새로운 기회를 찾아 외국으로 떠나겠다는 이도 있다. 다른 한편에는 국내에서 먹고살 수는 있지만 악다구니의 정치판과 부조리한 사회상에 염증을 느껴 한국을 떠나겠다는 사람도 있다. 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결국은 이 땅에서 살기가 힘들어졌거나, 싫어졌기 때문에 이민길에 나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떠나는 이들을 붙잡을 수도, 탓할 수도 없다. 이들의 탈(脫)한국 러시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외 이민의 증가는 국제화의 진전과 세계적인 한인 네트워크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바람직스러운 측면도 있다.

정작 우리가 고민해야 할 대목은 이민이 늘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들을 떠나게 한 한국사회의 문제다. 이민자들이 이민을 통해 벗어나려 한 우리 사회의 교육난.경제난.정치난은 이들이 떠난 후에도 이 땅에 사는 이들이 풀어야 할 과제로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