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1백억 장학재단 세울 겁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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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 1억원은 시작일 뿐입니다."

지난 12월 28일 한 노신사가 1천만원짜리 수표 10장을 본사에 맡겼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우리말보다 일본어가 더 익숙한 재일동포 사업가 정용현(鄭鏞鉉.73)씨.

그는 성금 기탁이 70년 간 떠나있었던 고국에 치르는 신고식이라고 했다. 앞으로 조국을 위해 복지.장학 사업을 하겠다는 약속이라고도 했다.

"당장 어떻게 도와야 할 지 방법을 몰라신문사에 부탁하는 겁니다. 사회의 약자라면 누구든 좋으니까 나눠주세요."

일본 사이타마(埼玉)현에서 연 매출액 1백20억엔(약 1천2백억원) 규모의 레미콘 생산 업체를 이끌어온 鄭씨는 지난해 4월 일선에서 물러났다.

"은퇴하고 나니 내 조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외국에서 '나그네 죽음'을 하긴 싫었어."

세 살때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건너간 뒤 줄곧 그의 삶의 터전이었던 일본. 하지만 그에겐 힘겨운 외국일 뿐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것도 '외국인'인 그에게는 취직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업 자금을 구하려 해도 나한테는 10엔도 안 빌려주더라고…."

鄭씨는 잠시 먼산을 바라봤다.

"일본인을 미워하진 않소. 내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인 친구와 그 부친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해마다 친구 부친 기일이면 성묘를 거르지 않는다고 했다.

레미콘 생산업을 하던 친구 부친이 기술자를 붙여주고 친구가 자금을 구해와 스물셋에 겨우 시작한 레미콘 사업. 명색은 사장이었지만 하루 세 시간 정도 자면서 사원들과 함께 일했다.

선반 작업을 하다 잘려나간 왼손 중지와 약지의 뭉뚝한 끝이 그의 고생을 짐작하게 한다.

鄭씨는 사업이 궤도에 올라선 뒤에도 첫마음을 잃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회사엔 회장실이 없다.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그를 포함한 6명이 함께 일했다.

이렇게 눈물과 땀으로 모은 1백억원을 그는 고국의 젊은이들을 위한 장학재단의 설립에 쓰고 싶다고 했다.

학비가 없어 와세다(早稻田)대에 다닐 수 없었던 아픈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는 물려주기 싫어서다.

그에겐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鄭씨는 "내 자식만 자식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鄭씨는 외환위기 이후 실업난 등으로 젊은이들이 패기를 잃어가고 있다며 무척 걱정했다.

"일본 신문.방송을 통해서 한국의 청년들이 삶을 너무 일찍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그들을 위한 상담소를 세워 용기를 주고 싶어요."

이 땅의 젊은이들을 도울 계획을 쏟아놓는 그의 목소리는 높고 힘찼다. 고희를 넘긴 그의 눈빛이 형형(熒熒)했다. 고국에서 생을 마치기 위해 왔다는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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