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대선] '인기 영합'이 경제 망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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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대통령 선거를 넉달 앞둔 1997년 8월 14일, 당시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가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을 찾았다. 기아차는 부도난 것도, 부도가 나지 않은 것도 아닌 미묘한 상태(부도 유예협약 적용)에 놓여 있었다.

李후보는 노동자 2천여명과 점심을 함께 하며 "기아 사태는 제3자가 인수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기아 가족 여러분이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한 여당 대표로서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열하루 뒤인 8월 25일 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도 "기아자동차의 제3자 인수는 안되며, 자동차 전업회사로 살리는 게 바람직하다"고 정부의 지원을 촉구했다.

선거를 앞두고 기아차와 관련된 집단으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발언이었다. 이같은 정치권의 움직임은 기아차의 법정관리를 추진하던 당시 경제팀의 방침과 정반대였다.

급기야 김인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직접 나서 "정치권이 기아 사태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아 경영진은 정치권.언론계.사회단체에 기대지 말고 채권단과 머리를 맞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제동을 걸었지만 기아 처리는 꼬여만 갔다.

결국 기아 사태는 부도 유예협약이 적용된 지 99일이 지난 그 해 10월 22일에야 정부의 법정관리행(行) 발표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 대가는 주가 폭락과 환율 폭등이었다. 대부분 경제 전문가들은 기아차 등 부실 기업 처리 지연으로 생긴 혼란이 외환 위기를 초래한 하나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선거공약이 경제에 큰 부담을 안겨준 사례도 있다. 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이북 5도민과 노동자를 위한 은행을 설립하겠다는 선거공약을 내걸었다. 이에 따라 동화은행(이북 5도민 은행)과 평화은행(노동자은행)이 설립됐다. 하지만 동화은행은 98년 퇴출됐고 평화은행은 최근 한빛은행에 합병되면서 간판을 내렸다.

김병주(경제학)서강대 교수는 "선거철만 되면 우리가 투입할 수 있는 가용 자원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려주는 '예산 제약선(線)'이 사라져 버린다"고 지적했다. 당장 선거에서 이기려는 정치인들의 욕심 때문에 주어진 조건에서 효용을 극대화하는 경제학의 기본 원칙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다. 그러나 시간과 자원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중요하고 바람직한 것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해 선택해야 한다. 문제는 그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KDI 국민경제교육연구소 편 『이야기로 배우는 고교생 경제』 22쪽)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기본적인 경제원칙이다. 그러나 선거 때만 되면 대통령 후보들조차 '고등학교 시절의 배움'을 망각하곤 한다.

金교수는 "선거 때 나오는 공약을 실제로 다 들어주려면 정부 예산의 몇 배, 아니 국민총생산(GDP)의 몇 배에 이를 것"이라며 "올해에는 여야 모두 현실적인 선거 공약을 만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리한 선거 공약을 내세운 후보가 당선되면 더 골치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랏돈을 쏟아부으면 그렇지 않아도 공적자금 부담 때문에 짓눌리는 재정이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金교수는 우리 경제가 남미 스타일로 전락할 위험성을 경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선거 바람이 불기 전에는 그래도 정부 관료가 정치인이 추진하는 무리한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다. 그러나 선거철엔 그게 힘들어진다. 집권 말기(레임덕)에 책임지는 일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익집단이 자기 몫 찾기에 나설 경우 정치도 관료도 제어하기 힘들다. 정책이 표류하면 대외신인도가 떨어질까 걱정이다."(김병주 서강대 교수)

선거 때마다 돈이 풀려 흥청망청하는 분위기도 문제다. 선거를 치를 때 돈이 얼마나 많이 풀리는지는 통계적으로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현금 통화나 통화량이 통계에서 드러날 정도로 눈에 띄게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LG경제연구원의 최근 연구 결과는 주목할 만하다. 과거 자료를 분석한 결과 선거기간 전후로 물가상승률은 평균보다 상승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산업생산은 선거 후 다소 위축됐다는 것이다. 정책 당국이 선거를 앞두고 경기를 지나치게 띄울 위험이 있다는 일부의 주장과 관련 있는 대목이다. 다만 선거가 끝난 시점에 경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드는 상황이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선거 후 물가 상승 및 산업생산 위축을 선거 탓으로만 돌리기 힘든 측면도 있다.

선거가 경기 침체기와 겹치면서 경기 회복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선거로 경제정책이 혼선을 빚으면 기업 경영 환경을 불확실하게 만들어 설비투자 의욕을 더욱 위축시킬 수도 있다. 선거로 물가가 불안해질 경우 이는 가계의 실질 구매력 감소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 내수 위축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운찬(경제학)서울대 교수는 "정책 당국이 선거를 의식해 경기부양에 신경쓸 게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키우기 위한 구조조정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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