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얼굴없는 의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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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년에 걸쳐 경남도에 15억원의 장학금을 기증하고도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한 독지가의 미담이 코 끝을 찡하게 한다. 장학금으로 인도 유학을 가게 된 학생들이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관계자를 졸랐지만 끝내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 소공동 롯데 백화점 지하 에스컬레이터 앞 구세군 자선냄비에 16년째 1만원권짜리 1백장 다발을 넣고 사라지는 '이름없는 천사'가 있다. 세상의 각박함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얼굴 없는 의인(義人)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평균적 기부문화는 경제수준에 비해 너무나 초라하다. '아름다운 재단'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5명 가운데 3명이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연간 평균 기부액은 9만8천여원. 전보다 크게 달라졌다지만 아직도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내는 이는 극히 적다.

미국인의 경우 98%가 매년 어떤 형태로든 기부에 참여하고 있고, 영국은 성인의 3분의2 이상이 매달 자선단체에 기부금을 낸다. 특히 미국은 전체 기부액의 77%를 소액 기부자들이 차지하고 있어 기부문화가 생활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기부문화는 몇몇 개인 또는 기업의 거액기부에 기대고 있다.

기부문화가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소액 기부를 생활화하는 태도를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사회단체들도 기부자에 대한 애프터 서비스 정신을 키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기부금의 쓰임새를 정례적으로 투명하게 보고하는 것은 그 하나가 될 수 있다.

불경기 탓인지 올해는 불우 이웃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지난해보다 더 떨어졌다는 게 사회사업 관계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빗방울 하나가 모여 내를 이루고 강을 만든다. 한 사람이 베푸는 온정은 비록 하찮다 해도 한 데 모이면 수많은 대중을 구제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이 시린 겨울, '나 한 사람이라도'라는 정신으로 헐벗은 이웃을 돕는 대열에 참여해 따스한 온기를 함께 나누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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