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공적자금' 감사도 부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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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홉달에 걸쳐 3단계로 이뤄졌다는 감사원의 공적자금 운용 및 감독실태에 대한 감사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금융 구조조정에서 교과서로 삼기엔 한계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우선 1백50조원의 조성과 투입의 골격을 결정한 정책적 판단에 대한 잘잘못을 충분히 가리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

감사원은 정책 핵심 담당자에 대해 한건의 징계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1998년 외환위기 특별감사에서 감사원이 직무유기 혐의 등을 걸어 강경식 전 부총리를 검찰에 수사의뢰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서 일부에선 이번 감사가 1백50조원이란 공적자금을 집행한 현 정부에 면죄부를 준 것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

◇ 잘못된 예측과 혼선=시장 관계자들은 1,2차 자금 조성과정에서 정부가 혼선을 빚는 바람에 조성금액이 불어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97년 말부터 투입된 1차 공적자금 64조원은 정교하게 계산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국회에서 동의받은 정부안은 ▶금융기관 증자에 16조원▶예금대지급.출연 등에 15조5천억원▶부실채권 매입에 32조5천억원을 쓰는 것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그 뒤 사용내역을 보면 출자가 4조5천억원 늘어났고 예금대지급 및 출연도 5조5천억원 증가했다. 반면 부실채권 매입은 12조원 줄었다.

2차 공적자금 조성이 늦어진 점에 대해 감사원도 거론하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지연됐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99년 8월 대우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는 데도 정부는 "추가 공적자금 조성은 필요치 않다"고 일관했다. 2000년 4월 총선 등 정치 일정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대우.현대 사태를 겪으며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부실이 늘어나자 그해 9월에야 추가로 공적자금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감사원은 "제도적인 장치가 미비한 상황에서 공적자금을 집행하면서 발생한 시행착오"라며 책임을 묻지 않았다.

◇ 2차 공적자금의 원인과 책임=50조원의 공적자금을 추가로 투입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대우사태였다. 대우사태의 1차적 책임은 98년 당시 연 20~30%의 금리로 회사채를 마구 발행해 시중 자금을 끌어들인 대우그룹이었지만, 금융당국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당시 금융당국은 금융기관들에 '시장 안정'을 앞세워 대우 채권의 만기 연장을 강제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감사원은 이 부분을 깊이 파헤치지 않았다.

◇ 금융기관별 투입 규모의 적정성=금융기관별로 공적자금 투입 규모가 과연 적절했느냐는 부분도 짚어야 할 대목이었다. 특히 서울.제일.평화은행은 살고 동화.대동은행 등은 퇴출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다는 의혹이 금융계에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정부가 노동계를 의식해 평화은행의 운명을 막판에 퇴출에서 생존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퇴출을 피한 부실 금융기관에는 거의 예외없이 공적자금이 추가로 들어갔다. 부실금융기관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규모를 놓고 금융기관이 금융당국과 '줄다리기'를 벌였다는 증언도 있다.

◇ 제일은행 매각조건 적절했나=헐값 매각 시비도 있지만 더욱 큰 문제는 매각조건이다. 추가로 부실이 생기면 떠안기로 한 풋백 옵션이 어떻게 매각조건에 들어갔는지에 대해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풋백 옵션 하나로 5조원의 공적자금이 추가로 들어갈 판이다.

감사원 스스로 "매각 과정에서 매수자측의 과도한 요구를 수용하고도 회계상 평가액보다 낮은 가격으로 매각한 것으로 보여지는 아쉬움은 있다"고 하면서도 이같은 실수가 누구의 책임인지를 규명하지 않았다.

◇ 규정 위반도 문책 안해=동화은행 등 12개 부실은행과 대한.한국투자신탁의 실적배당형 상품의 손실에 대해서도 공적자금이 들어갔다. 감사원은 "지원 대상이 아닌데도 공적자금을 지원했다"고 지적했다.

실적배당상품은 이득이 생기면 투자자가 더 가져가지만 손실이 나면 투자자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상품이다. 그런데 이같은 실적배당상품으로 들어온 자금을 굴리다가 까먹은 4조4천억원을 공적자금으로 메워준 것은 정부 스스로 시장원리를 무시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문책도 아닌 지적을 받았는데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 등은 해명자료를 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장이 무너질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주장했다.

감사원은 부실 금융기관에 대한 당국의 관리 소홀도 지적했지만 엄하지는 않았다."공적자금을 받은 금융기관들이 경영정상화 이행각서(MOU)의 경영개선 목표를 이행하지 못했는 데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는 감사원의 두리뭉실한 지적은 "대우관련 손실 등 경영혁신 노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측면이 있다"는 재경부 등의 반박을 자초했다.

이상렬.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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