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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뺏을 것만 따지다 핵심가치 ‘공존’ 놓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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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 28면

2000년 벽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메리칸 온라인(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은 21세기 최대 이벤트로 일컬어질 만한 사건이었다. 세계 최고 인터넷 기업과 초대형 미디어 기업의 결합이라는 상징성에 165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인수 금액이 가미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지금과는 다르게 업종 간 장벽이 상대적으로 두터웠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각각의 업종을 대표하는 이종(異種)기업 간 합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눈길이 쏠릴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실패에서 배우는 경영⑥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

먼저 합병의 필요성에 눈뜬 쪽은 AOL이었다. 1985년 전화선을 이용한 사용량 기반의 온라인 서비스업으로 출발한 AOL은 성공적인 기업공개(IPO)를 거치며 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나 이후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 사이에 가격경쟁이 심화되면서 정액제를 도입했으나, 가입자 수 증가에 반해 이익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난관에 직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팝업광고·배너광고 및 스폰서와의 제휴 등 광고 기반의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을 꾀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9년에 들어서면서 인터넷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기 시작했다. 이는 회사의 근본적인 수익모델에 대한 뼈아픈 일격이었다. 네트제로가 무료 인터넷접속 서비스를 앞세워 2000만 명의 회원을 모집한 것을 필두로 알타비스타·프리인터넷닷컴 등이 공짜 대열에 합류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AOL이 택한 것은 플랫폼 기반의 서비스 제공업체에서 콘텐트 기반의 서비스 업체로의 변신이었다. 또한 타임워너가 보유한 케이블 통신망은 AOL의 부족한 1%를 채워줄 수 있는 솔깃한 대안이기도 했다.

타임워너 입장에서도 AOL의 존재는 매력적이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뉴스와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던 타임워너는 AOL의 인프라가 탐났다. 마침 인터넷 기반 TV 네트워크를 목표로 1999년 새롭게 발족시킨 엔터테인돔닷컴(Entertaindom.com)이 폭주하는 사용자 접속을 감당하지 못해 삐걱대면서 안정적인 통신망에 대한 갈증은 더해갔다. 또한 수년째 자사의 주가가 답보 상태에 빠져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한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IBM이나 맥도날드·펩시코보다도 높은 시장가치를 인정받았던 AOL은 탐낼 만한 파트너였다.

인수합병 제의는 AOL 측에서 먼저 이뤄졌다. AOL은 우호적 인수합병(M&A) 형태를 유지하면서 유가증권 교환에 의한 인수 방식을 제안했다. 2000년 1월 합병 발표 초기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스닥지수는 하루 상승 폭으로는 최대치인 167포인트 상승했고 타임워너의 주가는 하루에 40% 가까이 치솟기도 했다. 양사의 합병은 TV와 컴퓨터(PC)·전화를 이용한 새로운 정보서비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합병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돼 이듬해 1월 인수금액 기준으로 사상 최대 거래가 공식 승인됐다.

그러나 불행의 씨앗은 합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터넷 사업에 대한 거품 논란이 끝이지 않는 가운데 인터넷 기업들의 주가 대비 실질 수익을 검증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잘나가던 나스닥은 상승세가 꺾이면서 2000년 3월을 정점으로 하락 추세로 반전하게 됐고 인터넷 버블은 급속도로 꺼지기 시작했다.

이후의 행보는 알려진 대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양사가 꿈꿨던 온·오프라인 통합 미디어 사업이 구호에 그치면서 합병 전 상대적으로 높은 순익을 기록하던 두 회사는 합병 후 만성 적자에 시달리게 됐다. 2004년에 처음으로 반짝 순익을 실현했으나 당초 목표로 했던 사업적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마침내 결별 수순에 들어가게 됐다. 지난해 12월 AOL이 분리 독립해 뉴욕증권거래소에 재 상장하면서 양사의 밀월은 막을 내렸다. 합병 당시 1600억 달러에 달했던 AOL의 시가총액은 재상장 후 30억 달러로 추락했다.

세기의 결혼이 파국으로 치달은 사태는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양사 간 통합의 실패다. 합병 당시 타임워너의 최고경영자(CEO)인 제리 레빈이 합병회사의 CEO를 맡았으나 회사 내 고위직은 대부분 AOL 임직원들이 차지했다. 요직을 꿰찬 AOL 출신 경영진이 타임워너의 사업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조직 장악에 실패하면서 조직 내 반목이 깊어졌다. 주요 경영진 사이에서도 혼선과 갈등이 빈번해졌고 이는 조직의 전체적인 역량 저하로 이어졌다. 단적으로 AOL의 성장 지향 경영 방식은 안정과 전통을 중시하는 타임워너 출신 경영진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제였다. 마찰을 해소하고 진정한 통합을 이뤄내려는 노력은 오간 데 없고 분열과 대립이 횡행했다.

이러한 난맥상은 근본적으로 합병 이후에 대비하는 준비 및 사후관리 부족에 기인한 바가 크다. 양사 모두 서로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M&A를 성공시키기 위한 협상에만 신경을 집중했을 뿐 정작 통합 이후 단계에서 수행해야 하는 액션 플랜에는 미온적이었다. 서류상의 결합과 단기적 이익에 매달린 나머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기업의 자원·지식·업무방식을 일관성 있게 합쳐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역량을 쏟지 못한 것이다. 물리적 결합을 뛰어넘어 화학적 통합으로 가기 위한 이른바 ‘PMI(Post Merger Integration, 인수합병 후 통합)’를 등한시했던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통합을 위한 원칙이나 방향이 일부 존재했지만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은 미흡한 수준이었다.

또 다른 불씨는 시장 상황과 사업 전망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부족했던 데서 비롯됐다. 합병을 고려할 시점에 AOL의 입장에서는 이미 확보된 고객에게 타임워너의 고급 콘텐트를 제공한다는 큰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시장의 현황과 인프라를 무시한 발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AOL 회원 대다수가 전화접속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데이터 용량이 큰 멀티미디어 콘텐트를 제공하는 데는 애초부터 물리적 한계가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고급 스포츠카를 탈 수 있다고 선전하고 손님을 기다린 꼴이다. 통합 시너지에 대한 냉철한 검토보다는 과대 포장된 이상론에 휩싸여 현실의 문제를 간과한 것이 결국 오판으로 이어진 것이다. AOL은 이후에도 비현실적인 목표에 대한 공약을 남발해 주주들의 의구심을 키웠으며 결국 인터넷 거품 붕괴와 맞물려 급전직하하는 비운을 맞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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