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컵] 잡초 축구인생들의 그라운드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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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25일 결승전만 남겨둔 올해 FA(축구협회)컵 대회의 최대 백미는 '아마 돌풍' 한국철도의 선전이었다.

비록 지난 15일 8강전에서 프로팀 전북 현대에 아깝게 무릎을 꿇었지만 2라운드 첫 경기와 16강전에서 각각 수원 삼성과 전남 드래곤즈를 연파한 한국철도의 질주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건돌리기의 술레처럼 프로팀들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국철도와 프로팀간의 대결은 여러가지 면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우선 '다윗' 한국철도의 1년 예산은 5억원에 불과하다. 한해 1백억원을 쓰는 프로구단에 비하면 20분의 1 수준이다. 그나마 1년짜리 계약직이 대부분인 축구단 20여명의 인건비를 빼고 나면 순수한 구단 운영비는 7천만~8천만원에 불과하다. 다른 실업팀도 한국철도 운영비의 서너배를 쓴다.

1994년 감독직을 맡은 이현창(53.사진)씨의 입에선 요즘도 "다른 팀 선수들이 한켤레 20만~30만원씩 하는 축구화에 유명 메이커 운동복을 입을 때 우리 선수들은 4만~5만원짜리 축구화와 '시장표'운동복에 만족해야 한다"는 푸념이 절로 나온다.

알려진 대로 한국철도에는 준프로급 선수들이 여러명 있다. 세명이 청소년 대표 출신이고 다섯명은 잠깐이라도 프로에서 뛰었다. 그러나 전체 선수 23명 중 8명이 부상해 교체 선수도 부족한 한국철도가 프로팀을 잇따라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 공포의 외인구단

한국철도의 감독과 선수들은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우선 이감독 자신이 뜻밖의 부상으로 일찌감치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축구판을 떠나야 했던 아픔을 지니고 있다.

팀내 최고참인 김찬석(31)도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정종덕 전 건국대 감독이 발탁한 김찬석은 대학 1년 시절, 황선홍.유상철 같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팀 주전자리를 꿰찰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모 프로팀과의 연습경기 중 발목을 다친 이후 계속 하향세를 그렸다. 플레잉 코치로 활약하는 김승희(34)코치도 대학 시절 무릎을 다친 후 한국철도까지 흘러오게 됐다.

일찌감치 축구에 대한 희망이 꺾이거나, 정상까지 근접했다가 주변으로 밀려나 열악한 팀 한국철도에서 만나게 된 좌절은 감독과 선수 사이에 동병상련의 끈끈한 유대를 만들었을 법하다.

◇ 이감독의 카리스마

이감독은 선수들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나는 고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청소년대표팀까지 거친 너희들이 훨씬 훌륭한 감독에게서 축구를 배웠을 것 아니냐"고 선수들을 다그쳤다.

'회유책'도 함께 썼다. 올해는 식사를 책임지는 아주머니가 있지만 지난해까지는 이감독이 직접 조리한 닭도리탕.김치찌개가 인기있는 특별 메뉴였다. 이감독이 입에 대지 않던 소주를 마시게 된 것도 선수들에게 격의없이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최효원(26)선수는 "처음 입단한 선수들은 대개 2~3개월은 마음을 못잡는다. 2천만원을 밑도는 연봉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으냐"며 경험담을 털어놨다. 그러나 고비를 넘기면 선.후배간, 감독.선수간의 끈끈한 정을 느끼게 되고 나중엔 공을 찰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년이 5년 남았다는 이감독은 "구단에 운영비 증액, 버스 교체, 승리수당 지급 등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구단측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한 최소한의 당근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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