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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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철문(1966~ ),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전문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을까?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집을 잃고
햇볕에 말랐을까?

한 뭉치에 백권씩 이백 뭉치의 책더미를, 아니
나무 등걸을
숲을
천장에 닿을 때까지 쌓는다
개미핥기의 입김만으로도 태풍이 되고
원주민 인부의 오줌발만으로도 노아의 홍수가 되는
보이지 않는 숨결들의
부서지고 으깨지고 표백되고 잉크가 찍힌
집을 쌓는다

이 중에 몇 권이 꼭 만날 사람을 만나
그를
얼마나 오랫동안 창가에, 혹은
길모퉁이에 세워둘까?
그 많은 교정지를 넘기면서도 듣지 못했던
환청을
책을 쌓으며 듣는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을가?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숲의 끝까지 달렸을까?

이슬 한 방울로 하루치 양식이 넘치고
깊은 숲이 조율하는 바람구멍이 아니고는,
그 작은 파닥거림을
하늘에 바칠 수 없는 것들

얼마나 많은 숨결들이 여린 살과 노래를 잃었을까?


가만히 앉아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희생의 대가로 인간인 나는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니까. 하물며 먹고 마시고 차타고 다니는 일임에랴. 이 시를 보니 조용히 책 읽는 일도 폭력적인 행위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서가의 책들은 회나 수육처럼 얇디얇게 저며진 나무들의 살이 아닌가? 그 나무에 붙어살던 뭇 작은 생명들의 낮은 숨결은 또 어찌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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