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 교수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진보를 훔치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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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배적 이념은 마르크시즘이고 지배적 현실은 자본주의다." 흔히들 20세기를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한다. 그 마르크시즘에 의해 세계는 오랫동안 두쪽으로 갈라져 싸움을 벌였다.

그 싸움에서 손해를 가장 많이 본 것은 마르크시즘이고 이득을 가장 크게 본 것은 자본주의다. 어째서 자본주의가 마르크시즘의 득을 그토록 크게 보았을까.지배적이었다고 할 만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르크시즘은 왜 그토록 손해를 보고 패배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마르크시즘이 너무 독선적이고 너무 교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교조주의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마르크시스트들 역시 마르크스 이론을 너무 검증 없이 믿었고 그 검증 없는 믿음만큼 자만에 차고 오만했다. 현실비판 없는 독선만큼 이데올로기의 파괴요소가 없고, 자만과 오만만큼 시스템 유지의 붕괴요인이 없다.

*** 마르크시즘의 독선.오만

반면 자본주의는 이념에서도 마르크시즘의 끊임없는 비판을 받았고, 현실에서도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그 마르크시즘에 의해 자본주의는 간단없이 경고되고 위협됐다.내부적으로도 마르크시즘의 이념적 지원을 받은 노조에 시달렸다.

그 공격과 도전, 그 경고와 위협이 마침내 자본주의를 안주와 정체에서 벗어나게 했고, 자본가들의 방심과 도덕적 방일을 막았다. 마르크시즘이야말로 자본주의 활성화의 트랙트 기능을 했고, 자본가들의 변신과 혁신의 프로모터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가장 공격적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시즘이 무너지고 가장 위협적 시스템으로서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지금 자본주의는 순탄대로를 달리고 있는가. 경영학자 드러커의 말대로 마르크시즘이며 공산주의 체제를 파괴하던 바로 그 힘이 지금 자본주의를 쇠퇴케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명백히 자본주의는 위협받고 있다.

그 위협은 도전이 없는 데서 오는 응전의 쇠퇴에서다.자본주의가 마르크시즘을 극복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마르크시즘을 통해 내부붕괴의 요소를 발견하고, 그리고 그 내파(內破)요인을 치유해 가는 치열한 응전의 과정을 통해서다.

진보와 보수는 상호대립적이면서 상호보완적이다. 보수와 진보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진보파는 지배적 이념을 제시하고 보수파는 지배적 현실을 제공한다.

진보파의 이념에 경고되지 않는 보수파는 침체한다. 보수파의 현실에서 새로운 꿈을 찾아내지 못하는 진보파는 몰락한다. 보수파에게 진보파의 절규와 그들의 이데올로기, 그들이 높이 치켜드는 이상, 그리고 그들이 꾸는 꿈보다 더 좋은 묘약은 없다.진보파에겐 보수파들이 만들어 내는 현실제도와 현실정책, 그리고 그 정책을 현실에 옮겨 놓는 그들의 메서돌로지(methodology)만큼 그들의 새로운 사상의 텃밭은 없다.

문제는 지금 우리 현실이며 우리 현실의 위기다. 그 위기의 제공자는 보수세력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진보세력이다. 그것은 마르크시즘처럼 보수파에 '경고와 위협'이라는 묘약을 제공하는 진보세력의 몰락에서 온다.

이는 생생했던 진보세력들이 특히 이 정권 들어 기득권세력인 양 행세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진보세력 특유의 순수성과 올곧음을 잃고 권력기관화했다는 비판은 오래 전에 나온 소리다. 심지어는 홍위병 내지 정권친위대 소리를 들을 만큼 개혁의 대상이 어디 있는지조차 분간 못한다는 지탄도 어제 오늘 듣는 지탄이 아니다.

*** 보수파 도덕적 해이 직면

'윤전기에 타격을 가하는 깡패방식의 언론운동'을 스스럼없이 부르짖는 것도 이 개혁파며 진보세력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한 단면이고, 선생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되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노조를 만든다고 외치는 행태도 그 한 단면이다.

더구나 이 시대 가장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작가의 책을 장례 치른다고 날뛰는 히스테리는 진보가 아니라 문화파괴 그 자체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손실이며 위기는 불과 수 년 전까지도 신선하고 활발했던 이 진보세력들의 정신적.윤리적,그리고 이념적 타락이다.이제 그들이야말로 진보세력이 아니라 '진보를 훔치고 있는 세력들'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만큼 보수파도 도덕적 해이를 빨리 맞는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송 복 교수 <연세대.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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