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7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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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대왕마마 유고시 왕위를 계승받을 상대등 김충공은 연로하고, 제2의 권력서열인 김균정은 '충분히 젊다'는 김양의 말은 왕위에 오를 기회는 오히려 김균정이 더 많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감히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말은 역적모의와 같은 불충한 말이었던 것이다.

"네 이놈."

아버지의 명령으로 잠시 칼을 거뒀던 김우징이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우징은 칼을 들어 당장이라도 벨 듯 허공에 치켜 올렸다.

"네놈의 피 속에 김헌창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네놈의 요사스런 혓바닥을 잘라버릴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김양은 자연자약하였다. 김양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는 제 목을 베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 혀는 잘라버리지 못할 것이나이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는 선대의 참사를 잊으셨나이까. 대내(大內)에서 있었던 골육의 상쟁을 잊으셨나이까."

골육이라 함은 '골육지친(骨肉之親)'을 뜻하는 말로 부모와 자식,또는 형제자매들의 가까운 혈육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골육상쟁은 이처럼 가까운 혈족의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해치며 싸우는 일을 가리키고 있음인 것이다.

김양이 말하였던 골육상쟁.

그것은 흥덕대왕의 선왕이었던 헌덕왕이 일으켰던 궁정 쿠데타를 이르는 말이다.

헌덕왕은 자신의 형 소성왕(昭聖王)이 죽고 왕위가 소성왕의 태자인 청명(淸明)에게 돌아가자 스스로 섭정(攝政)을 자처하고 나섰다. 왜냐하면 이때 왕의 나이가 13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10년 동안 재위하면서 주로 소원했던 일본과의 우호를 회복하는 등 뛰어난 외교를 펼쳤으나 섭정을 하고 있던 작은 아버지 헌덕왕, 즉 김언승(金彦昇)에 의해서 시해 당하고 비참한 생애를 마감하였던 것이다.이때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애장왕(哀莊王)10년 7월.

왕의 숙부 언승이 그의 아우 아찬 제옹(悌邕)과 더불어 군사를 끌고 궁궐로 들어와 난을 일으켰다. 왕을 시해하고 왕제 체명(體明)도 왕을 시위하다가 해를 입었다.왕을 추시(追諡)하여 애장이라 하였다."

신라 역사상 궁중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골육상쟁. 사후 임금의 이름에 '슬플 애(哀)'자가 들어간 최초의 임금이었던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사람은 바로 그의 숙부였던 김언승,즉 대왕마마의 선왕이었던 헌덕왕이었던 것이다.

"나으리."

김양은 무서운 기세로 김우징이 칼을 빼들고 있었으나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만일을 예비해두지 않으면 언제 또다시 대내에서 그와 같은 골육상잔이 벌어질지 모르나이다. 대왕마마께오서는 연로하시고 병환에 드셨나이다. 게다가 후사까지 없으시나이다. 상대등 나으리께오서도 또한 연로하시나이다."

"칼을 치워라."

묵묵히 김양의 말을 듣고 있던 김균정이 단호하게 명령하였다.

"내 앞에서 다시는 칼을 빼어들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더냐."

"하오나 아버님."

마지못해 칼을 내리며 김우징이 말하였다.

"이놈의 목을 베어두어야 반드시 후환이 두렵지 않을 것이나이다."

"칼을 치워라. 더 이상 칼에 피를 묻히지 않을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였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김균정은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사기에도 김헌창의 반란을 평정한 그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균정은 성산(星山)에서 적과 싸우며 이를 멸하고, 제군과 함께 웅진(熊津)에 이르러 적과 대적하여 참획(斬獲)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사기에 나와 있는 표현대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적을 베고, 죽인 김균정이었으므로 그는 무엇보다 전란과 골육상쟁의 비극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비극적으로 죽은 애장왕에게 각별하게 총애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애장왕은 특히 김균정을 사랑하여 김균정을 가왕자(假王子)로까지 삼았던 것이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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