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본의 아닌 지하철 프러포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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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다. 사범대에 진학한 나는 경험도 쌓고 등록금도 마련할 겸 입학한 뒤부터 줄곧 과외를 하고 있었다. 그날도 과외 수업을 하러 가기 위해 4호선 지하철을 탔다. 혜화역에서 사당까지는 정확히 28분. 꿀맛 같은 단잠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침 두세곳 빈자리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앉을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피곤한 몸으로는 한번 잠이 들면 종점까지 가야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10여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평소 잠이 많던 내게 2~3명씩 5개 그룹을 지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두세번씩 장소를 옮겨다니며 과외를 한 뒤 집에 돌아오면 오전 1~2 시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과제나 시험이 있는 날이면 잠을 하루에 두시간 자기도 힘들었다.

문제의 그날은 최악이었다. 학생들의 중간고사와 내 전공시험의 일정이 겹쳤다. 사흘 밤을 꼬박 새운 다음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또 과외를 하러 가야 했다.

"졸면 죽는다."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을 부릅뜨고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힘껏 잡고 섰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서서 졸면 가끔 온몸에 힘이 빠지며 무릎이 꺾일 때가 있다. 그렇게 서너번 무릎이 꺾였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달콤한 잠의 유혹을 어찌 물리칠 수 있으랴. 서울역을 지나는 걸 보았는데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든 모양이다. 어느 순간인가 손잡이를 놓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눈을 떴지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고개를 들었는데 갈색 스타킹이 눈에 들어왔다. 불길한 예감에 앞을 보니 한 젊은 여성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야 수군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프러포즈하나봐" "어머 멋있다" 등 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나도 그런데 그 여성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죄송합니다."

잠이 확 달아난 나는 그 여성에게 꾸벅 절하고는 부리나케 옆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약자 석에 몸을 숨기고 몇 정거장을 지났을까. 얼굴빛이 돌아오자 나는 옆칸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손잡이를 잡고 얼굴을 천천히 돌리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내가 돌아볼 것으로 생각했는지 옆칸의 모든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전철역인지도 모른 채 문이 열리자마자 내렸다. 그러고는 전차와 반대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그날 과외 시간에 늦었음은 물론이다. 그날 이후 난 지하철에 앉아있는 젊은 여성들만 보면 얼굴이 화끈거려 남자들이나 아줌마 앞에 서서 가곤 한다.

허진(25.학군장교.서울 봉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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