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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광희 교수 '시간의 철학적 성찰' 내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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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늦은 밤 사위가 조용해질 때 죽음 이후를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시간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성에 전율을 느낄 때,우리 모두는 철학자가 되기 시작한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 자체는 바로 '시간' 위에서 가능하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안한 이유도 바로 시간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시간은 생명의 영속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함께 어느 시대나 주요한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었다. 한 노(老) 교수가 시간의 열차를 타고 성찰을 안내하는 두툼한 철학서를 내놓았다.

소광희(67) 서울대 명예교수가 내놓은 『시간의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刊)은 노교수가 그동안 쌓아온 해박한 지식과 명료한 분석으로 빚어낸,국내에서 보기 어려운 역작이다. 젊은 세대 연구자들이 현란한 외국의 이론을 쏟아놓으면서도 진득하게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실에 비춰보면 노교수의 작업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가 시도한 것은 '시간'을 통한 지적 여행. 인간이 상상해놓은 모든 종류의 시간을 통해 그것이 담고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을 탐색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은 곧 세계에 대한 이해이자 인간의 자기이해인 셈이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이 객관적 시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즉 시간에 대한 의식은 세계속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 노력에 비해 상식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 상상력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지적 탐색과 성찰을 거친 것이냐일 것이다.

이 책은 시간을 유형별로 나누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시간이 돌고 돈다는 '회귀사상'이나 시작과 끝이 일직선으로 진행된다는 '종말론적 시간', 인과관계의 연결 속에 구속된 '현세적 시간'과 현실의 업(業)과 죄를 넘어서게 할 것 같은 '성스러운 시간'은 지적 상상 속에서 낯설지 않다.

달력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상대성 이론에 이르는 과학의 시간개념은 물론이고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시간개념의 변화도 추적한다.

그러나 워밍업이 끝나면서, 책읽기에 필요한 철학적 지식은 만만치 않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아우구스티누스.칸트.헤겔.베르그송.후설.하이데거 등으로 이어지는 시간여행은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

가령 '영원'개념을 논리적.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는 근대 합리론자 스피노자의 작업은 지적 오만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가 왜 이런 일을 시도했으며, 그것이 가진 인간.세계.영혼에 대한 거대한 지적 드라마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준비없이는 결코 쉽지 않다.

아직도 제자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蘇교수가 은퇴후 이런 대작을 내놓았다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놀라워 하고 있다. 이런 원로 학자의 경륜이 녹아난 이 책에 질린다면 우리 시대의 지적 빈곤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려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경문사刊.1995)를 국내 최초로 번역했던 그는 앞으로 3년 후에는 이번에 출간한 『시간의 철학적 성찰』의 맞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존재론'에 관한 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이 땅의 노철학자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되는 셈이다.

김창호 학술전문위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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