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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정신분석학 새 지평 연 자크 알랭 밀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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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의 제자이자 사위인 자크-알랭 밀레(Jaques-Alain Miller)는 라캉의 세미나 편집자이자 현 정신분석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의 한 명이다.

지젝의 슬로베니아 학파,미국의 신라캉학파의 부르스 핑크와 앨리 래글랜 설리번 등은 모두 밀레가 이끄는 ‘프로이트 원인학교(ECF)’ 출신의 라캉주의의 전위대다.

밀레가 라캉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것은,프랑스정신분석협회(APF)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맡아 세미나를 시행하던 라캉이 1964년 IPA에서 파문당해 자신의 거처를 고등사범학교(ENS)로 옮겨 열한번째 세미나를 시행했을 무렵이다. 당시 라캉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고 밀레는 스물을 갓 넘은 ENS 학생이었다.

그 무렵 밀레는 프랑스의 브레인을 대표하는 ENS에서도 수재들만을 선별해 전투적인 철학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인식론 서클'이다.

현재 프랑스 철학계의 실세인 알랭 바디우, 언어학자로서 국제철학원 원장인 장 클로드 밀네, 파리8대학 정신분석과 교수인 프랑수아 레뇨에 이르기까지 당시 이 작은 모임의 청년들은 후일 프랑스 지식층을 대표하는 거장들이 된다.

그들이 출간한 『분석을 위한 노트』는 라캉주의와 마오이즘의 접속으로 당대의 지식층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데리다.푸코.이리가라이 등과 같은 당대의 논객들을 지면 위로 불러들인 『분석을 위한 노트』는 후일 정신분석학계에 전설적인 잡지로 기록될 『오니카르(Ornicar)』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 그룹을 주도한 밀레는 이러한 전력에서 출발해 라캉을 가장 직접적인 계보에서 읽어낸 인물이다. 그가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라캉에 대한 치밀한 합리주의적 독법을 통해서다. 그의 청년기 작업은 시니피앙(sinifiant.記表)과 집합론을 독특하게 접목시켜 이른바 '구조주의적 라캉'을 한 단계 고양한다.

그러다가 라캉이 죽기 직전 카라카스 대회에서 밀레는 '또다른 라캉'이라는 이름으로 라캉 독법에 대한 하나의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라캉의 초기 제자들로부터 라캉을 분리시키는 초안을 마련한다. 라캉 사후 프로이트 원인학교에서 본격화한 이 독법은 특이하게도 라캉을 라캉과 대립시켜 읽는 방법이다.

'라캉 콘트라 라캉'이라고도 불리는 이 단절의 독법에는 밀레의 특이한 계산법이 숨겨져 있다. 라캉의 언설은 그 배후의 욕망, 즉 '라캉의 욕망'에 의거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특이한 점은, 밀레는 이러한 라캉의 욕망을 프로이트의 욕망으로부터 구별해 낸 뒤 그것을 정신분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단초로 삼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라캉은 1964년 프로이트를 정신분석사에서 분석을 받지 않고 분석을 행한 유일한 인물로 지목하고 정신분석의 본원적인 유죄성에 관해 말한 바 있다. 남을 분석하기 위해선 정신분석가 자신이 먼저 침상에 누워 자신의 무의식을 분석해야 하는데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그 자신이 최초의 분석가였던 관계로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라캉은 프로이트 내면의 분석되지 않은 그 '무엇' 때문에 그가 고안한 정신분석은 그 자체의 신경증 속에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라캉이 제시한 '정신분석가의 욕망'과 이른바 '통과제도'는 바로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정신분석 자체의 갱생의 노력이다.

라캉 사후 80년대 밀레의 작업은 라캉의 언술 속에 산재해 있는 그의 욕망의 흔적들을 도식을 통해 명료하게 담아내고 이를 통해 임상.윤리.정치의 접속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원초적인 결핍을 안고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표현하려고 하지만 말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과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기에 인간은 그 시니피앙들의 사슬을 따라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이러한 존재상실을 사회적 이상(理想)을 통해서 끝없이 보상하려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뿌리없음을 사회적.도덕적 초자아(超自我)의 명령에 대한 복종으로서 액땜한다는 것이다. 가령 나치의 전체주의는 존재상실과 이에 대한 사회적인 이상의 충원물이 접속되어 빚어낸 환상의 산물이다.

'밀레.라캉주의'에 있어 환상이란 집단적이건 개인적이건 거세되고 남은 향유의 잔여물(부분)을 가지고 상실 이전의 향유(전체)를 소급적으로 구성해 내는 창틀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환상의 창틀이 인간에게 보상의 쾌락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자아의 명령에 대한 복종은 강요에 의한 복종이기보다는 무의식적 의지에서 비롯된 복종이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환상과 마찬가지로 쾌락의 대상이기에 집단으로서의 인간을 항상 유혹하는 것이다. 밀레가 보기에 정신분석은 주체를 환상 저편의 이상(理想)이 없는 욕망, 환상으로부터 면제된 욕망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의 임상적 목표인 동시에 정치적.윤리적 목표이기도 하다.

90년대에 와 밀레는 이 작업을 자본주의 전반에 대한 정치적 비판으로 확장하며, 정신분석을 자본주의가 봉착한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지렛대로 만든다.

과학이 생산한 풍부한 재화들이 인간에게 예전보다 풍족한 향유를 제공하지만 이는 공통의 방식으로 포장된 획일화된 향유일 뿐이다. 욕망은 그러한 손쉬운 대상들에 의해서 자신의 특이성을 잃게 된다.

밀레.라캉의 정신분석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미궁 속에서 인간이 주체로서의 욕망을 견지하고 자신의 특이성을 완성하는 방법이 되고자 한다.

맹정현 파리8대학 박사과정 ·정신분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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