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⑤ 온양6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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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6동은 1986년 온양시 승격 이후 무려 4배나 인구가 늘어났다. 이순신종합운동장 뒤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숲을 이루고 있다. [조영회 기자]

아산시는 2개 읍(邑), 9개 면(面), 6개 동(洞)으로 구성돼 있다. 아산시는 2003년 9월 온양온천의 옛 지명을 살린다는 취지로 온양온천1동, 온양온천2동, 권곡동, 신정동, 용화동, 온주동을 온양1동, 온양2동, 온양3동, 온양4동, 온양5동, 온양6동으로 각각 변경했다.

과거 온주동으로 불렸던 온양6동은 백제시대에는 온정, 통일신라시대에는 탕정주로 고려시대에는 온주, 조선시대에는 온양군이었다가 1914년 3월 1일 아산군 온양면으로 1941년 3월 1일 온양읍으로 승격됐다. 이후 1986년 1월 1일에 온양시 온주동으로 바뀌었고, 1995년 1월 1일 아산시 온주동으로 바뀌었다.

행정동 명을 ‘온양’으로 바꾸면서 마지막 순번인 6동이 됐지만 온양6동이 진짜 온양. ‘온양온천’이라는 지명에서 ‘온양’은 현재 온양6동을 말한다. 이 때문에 과거 어르신들은 온양 가는 버스가 온양온천역이 있는 시내에 내려주면 “온양에 내려달라 했는데 왜 여기까지 왔느냐”며 버스기사를 혼내는 일이 빈번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마을

온양6동은 온양 본동답게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읍내동에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보물 537호다. 지주는 당간을 꽂기 위한 받침대이다. 당간은 ‘괘불’이라고도 하는 불기의 일종이다. 읍내동 대로 옆에 있는 당간지주는 옛 사원을 헐고 관아를 개기(開基)했다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도 산세로 보아 사원이 있을 만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이나 문헌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화강석으로 된 당간지주가 있을 뿐이다.

온양향교도 온양에서 공주방면으로 연결되는 국도 39호 동쪽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연대와 창건 당시 위치 및 조선전기의 변천사 등에 대해서는 문헌자료가 없어서 자세히 볼 수 없다. 다만 현감이 파견되기 시작한 조선 태종조 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축된다. 온양향교는 원래 현존 위치인 읍내동에 인접한 법곡리(능뫼)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고 전해진다.

읍내동에 있는 온주아문과 동헌은 충남유형문화재 16호다. 조선시대 온양군 관아 건물로 낮은 남향의 야산을 배경으로 해 문루와 동헌이 서있다. 아문에는 온주아문(溫州衙門)이라고 현판이 붙어 있는데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군 이름을 온주라해 그대로 이름을 따서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10년 만에 인구 4배로 늘어

온양6동은 읍내동, 장존동, 좌부동, 풍기동, 남동, 법곡동 등 6개 법정동으로 구성돼 있다. 온양문화원이 발간한 『온양아산마을사』에 따르면 1986년 온양시 승격 당시 6164명에 불과하던 인구가 현재 2만4628명(9404가구)으로 4배 가까이 늘어났다.

특히 1993년 읍내주공아파트를 시작으로 좌부동 초원아파트 장존동 청솔아파트, 풍기동 인정프린스, 동일하이빌, 현대아이파크 등 대단위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했다.

2008년 4월 연면적 2만4680㎡ 관람석 1만9284석 규모의 이순신 종합운동장이 들어섰다. 종합운동장은 아산시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다. 현재는 각종 체육, 문화행사가 줄을 이어 시민들의 생활체육공원으로 자리 잡았다. 시민들을 위해 댄스스포츠 강좌 등을 개설해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곳 온양에서 태어나 100년의 역사를 가진 온양초등학교(당시는 온양명륭신상소학교)를 졸업 한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은 고향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렸을 때 추억 그대로 따스한 햇볕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살아가는 훈훈한 온양사람들. 때 묻지 않고 살아가는 온양사람의 인정이 내가 가장 내세우고 싶은 내 고향의 자랑거리다. 발전하지 않아도 좋다. 조용히 그리고 욕심 없이 저 흙 속에 바람 속에 천년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온양”이라고.

글=장찬우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권태혁 향토지발간추진위원장 “사라진 자산 너무 많다”

온양6동은 향토지 발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마을에서 낳고 자란 어르신들이 모여 무보수로 8개월이 넘도록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써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향토지 발간을 진두지휘한 위원장 권태혁(76·사진)씨와 부위원장 윤종수(73)씨를 만났다.

Q 향토지 발간 준비는 언제부터.

지난해 9월 지역에서 낳고 자란 7명이 모여 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고대사부터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모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수집했고 마을 어르신들의 증언을 듣는 일을 쉼 없이 하다 보니 어느새 책을 낼 단계에 오게 됐다. 마을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만든 결과다.

Q 사라진 역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96세 된 마을 어르신을 찾아가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총기가 흐려지셔서 기억하는 게 많지 않으셨다. 과거에 지금 온주아문에서 좌부리까지 장이 섰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해방되고 장이 온양온천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후 장을 복원하기 위해 몇 차례 난장이 섰다는 말이 있으나 이후로는 장이 서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장이 서던 이곳을 ‘장벌’이라고 불렀다.

Q 향토지 발간을 준비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명이다. 온양이라는 지명을 되찾기 위해 행정동을 ‘온양’이라고 했다면 당연히 이곳은 온양1동이 되었어야 한다. 이곳은 600년 전부터 온양으로 불렸던 곳이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처럼 온주동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유지했어야 맞다. 행정동명 하나라도 역사적인 배경과 근거를 가지고 지어지고, 붙여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Q 재미있는 전설 하나 소개한다면.

전설까지는 아니어도 근대에 지역의 역사를 바꾼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일제 강점기에 놓아진 장항선 철로와 관련된 이야기다. 이 시기 이완영이라는 세도가가 살았는데 장항선 철로가 계획된 일대에 땅을 가진 지주였다. 그런데 ‘마을에 쇳소리가 나는 것이 싫다’며 끝까지 땅을 내놓지 않아 장항선 철로가 변경됐다고 한다. 그때 계획대로 장항선 철도가 마을을 지나가게 됐다면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Q 향토지는 언제 나오나.

9월이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마을에서도 온양6동과 비슷한 시기에 향토지 발간 사업을 시작했는데 우리마을이 가장 먼저 책을 내게 됐다. 온양 본동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살아있는 주민들이 함께 힘이 되고 서둘러 준 덕이다. 아는 것이 없어 눈 뜨고 잃어버린 소중한 자산이 한둘이 아니다. 앞으로는 후손들이 지켜 낼 것으로 믿는다.  장찬우 기자



■ 지명의 유래

읍내동
본래 온양군 읍내면에서 온양군이 되었으므로 읍내라 했다. ‘장벌’이라고도 불렸는데 온양 관아가 있을 당시 주기적인 장이 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존동 남산들(온양천의 동쪽 설화산 기슭)과 슬앞(장존)들이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 ‘장중이’ 또는 ‘장존’이라 했다. 먹을 물이 없어 말과 소가 죽었다는 뜻의 ‘갈마지’라고도 불렸다.

좌부동 본래 읍내면 지역으로 읍내의 왼쪽에 있다 해 ‘좌부’ 또는 ‘좌의비’라 했다. 전주이씨 집성촌이 있었다. 지금은 희귀성이 많은 마을이 됐다. 소금장수의 묘가 있다해 ‘소금쟁이’라고도 불렸다.

법곡동 마을입구 강청묘 산에 정경부인 묘소가 있어 ‘능미’라 불렸다. 능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모양이 전봇대 같다 해 ‘전주고개’로 불린다.

풍기동 ‘밤줄’이라는 지명이 내려오는데 밤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선무니’라는 지명은 망을 앞에서 흐르는 냇물을 선비들이 이용했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풍기 북쪽에 성문이 있었는데 ‘성문이’가 선무늬가 됐다는 설도 있다.

남동 늘(관)을 짜던 곳이라 해 ‘늘안말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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