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3기 내 자본주의 경험, 북에 도움됐으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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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일산에서 모란각을 운영하고 있는 김용씨가 8일 저녁 식당에서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내 이름이 들어간 브랜드 이미지를 살리려다 회사가 망했다면 믿겠어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선 브랜드 이미지가 참 오래가더군요. 그 덕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요.”

새터민 방송인이자 사업가인 김용(50)씨는 20년 동안 성공과 좌절을 반복하며 오뚝이 인생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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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갓 넘긴 그가 북한을 탈출한 것은 1991년. 한국의 환대는 과분할 정도였다. 방송인·가수로 활동하며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정착금에다 CF 출연료 등으로 거액의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두 번이나 사기를 당하고, 보증까지 잘못 서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그때가 93년이었다.

사람을 좋아했던 그는 그 와중에도 방송을 하며 인연을 맺은 연예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직접 만든 평양냉면을 대접했다. “음식 맛이 기막히다. 음식점을 내보라”는 격려와 권유가 이어졌다. 96년 6월 경기도 일산에 문을 연 ‘모란각’ 1호 점은 이런 권유에 힘입어 시작됐다.

‘모란각’ 프랜차이즈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번성했다. 3년7개월 만에 국내와 미국·일본에 94개의 체인점을 뒀다. 김씨는 “한 해 10억원이 넘는 세금을 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번 돈은 고스란히 저축했다. 2000년 ‘저축의 날’엔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고아원·양로원·새터민 시설 등에 수십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잘나가던 그가 또다시 좌절한 것은 그를 일으켜 세운 체인점 때문이었다. 2001년 김씨는 프랜차이즈 업소를 찾아다녔다. 고마움을 전하고, 제품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내가 만드는 냉면이 아니었다. 심지어 ‘김용’얼굴을 걸어놓고 평양냉면 대신 함흥냉면을 내놓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는 ‘김용’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방식대로 만들지 않는 체인점을 과감히 정리했다. 하지만 이미지 수성을 위해 시작한 체인점 수술이 교각살우(矯角殺牛)가 됐다. 체인점 감소→수입 축소→자금난으로 이어진 것이다. 2005년 그는 결국 또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그사이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2004년). 김씨는 “잊으려고 사흘 동안 잠만 잤다”고 말했다.

실의에 빠진 그의 어깨를 직원들이 토닥였다. “통장에 한 푼도 없는데 잠이 오느냐”는 호통에서부터 “돈은 없지만 ‘김용’이란 이름과 모란각이란 브랜드는 남은 것 아니냐”는 격려가 흔들리는 김씨를 붙들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6년 경기도 일산에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모란각’을 재건했다. 주방·홀·냉면조리기술자 등 왕년의 ‘노병’들이 모두 그를 도왔다. 식당은 얼마 가지 않아 옛 명성을 찾았다. 냉동냉면과 냉면김치는 미국·캐나다·호주 등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대형 유통마트와 TV홈쇼핑에 진출해 연간 수십억원의 매출도 올리고 있다. 모 홈쇼핑에서 팔리는 그의 냉면은 냉면 부문 판매 1위 자리를 3년째 고수하고 있다. 최근엔 ‘용라면’이란 라면체인점까지 시작했다.

김씨는 “북한도 천안함과 같은 행위를 하지 말고 경제에 눈을 뜨면 좋겠다”며 “내 경험이 북한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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