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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 생각은…

문화재 가치 있어야 '고택'인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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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나는 고택의 유지와 관광자원화를 위해서는 구경만 하는 집이 아니라 주인이 살면서 손님들에게 우리의 전통적 생활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업을 해야 하는데, 화장실과 샤워실.입식부엌 등 편의시설을 당국이 지원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을 여러 차례 관계 요로에 하던 중 문화관광부 관광국에서 의논 좀 하자고 해 서너 차례 상경해서 배경 설명을 했고 마침내 법인 결성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2004년 7월 24일 사단법인 고택문화보전회를 탄생시켰다. 회원이 된 고택주들은 대부분 이전부터 이런 단체의 발족을 기대하고 있던 차여서 조직은 금방 이뤄졌다.

문화부는 고택의 관광자원화를 위한 첫 단계 사업으로 화장실과 샤워실.입식부엌 등 편의시설 지원으로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10억원씩을 확보해 놓았는데 그 대상 고택을 선정하는 일을 고택문화보전회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일단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신청받은 고택 114개가 있으니 이들을 현장답사해 올해에 30개소를 선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로 강원도 영월에서부터 아래로 해남 보길도까지 전국을 뛰어다니며 집 구경을 했다. 강원도 영월에서 밤중에 전남 나주까지 차를 몬 적도 있고 머나먼 보길도를 배를 타고 건너가서는 30분도 머물지 못하고 되돌아오기도 하고 불빛 없는 폐가를 손전등으로 둘러보기도 했다. 정말로 짜증나고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지자체 공무원의 자질도 천차만별이어서 상부에서 온 공문을 잃어버린 곳, 잊어 먹은 곳, 내용을 이해 못한 곳도 있었다. 당연히 지원 대상으로 신청했어야 할 집을 빼먹는가 하면 그 집주인과 사이가 나쁘다고 고의로 누락시킨 경우, 그리고 이미 주인이 자비로 설치한 화장실과 샤워실을 철거하라고 들볶는 공무원도 있고 절간도 고택에 포함된다고 생각해 우리를 끝없이 산중으로 안내해 간 공무원도 있었다. 이럴 바엔 대상 가옥 신청을 지자체로부터 받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상 가옥 선정에는 지역 안배도 없을 수 없다. 아름드리 기둥에 50~99칸에 이르는 경북 북부지방의 고택들만 선정할 게 아니라 평균 18㎝ 기둥에 이삼십칸 남짓한 호남의 대표적 고택들도 지원해 줘야 한다. 경남 함양의 정일두 선생 고택은 멋스럽고 웅장했지만 빈집이니 지원할 수 없고, 광주의 고제봉 장군 종택은 폐허이나 후손이 기어이 살려내겠다니 지원해야 한다.

어떤 지자체는 우람한 종택.고택 등 문화유산이 많은 곳인데 이들을 신청하지 않고 과수원 안에 있는 자그마한 농가들만 신청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문화재에는 개보수때 현상변경 허가가 어려우므로 팜스테이용으로 비지정 가옥을 신청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인근의 유명한 고택들이 텅텅 비어 있었다. 물론 현상변경 허가를 얻으려면 공무원의 노고가 따라야 한다. 그것이 귀찮다고 유리문 달린 납작기와집을 신청하면 어찌 되는가!

우리가 지키고 물려주고 보여주고 자랑해야 할 것은 문화재이지 보통가옥이 아니다. 우리가 문화재를 관광자원화하는 이유는 그것을 더 잘 보존하기 위한 것이지 훼손해가면서 돈만 벌라는 것이 아니란 점을 공무원들조차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지례예술촌은 샤워실과 화장실을 일찍부터 갖추어 놓았기에 지금엔 영국에서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지 않는가. 그러고도 한편으론 온돌방에 장작불을 때줌으로써 외국 학생들이 평생 잊을 수 없는 한국여행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재래식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현대식도 갖추자는 말이다.

문화부는 애초 올해에 30개소를 선정하고 내년에 30개소, 도합 60개소를 선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원금액이 넉넉지 않아서 부실공사를 하게 되면 준공 후 얼마 안 가서 수도 파이프가 얼어터지는 등 고장이 나는 수가 있다. 그래서 그걸 고치느라 가옥주가 또 빚을 내게 되면 어떡하나? 아예 적게 선정하고 충분한 지원금을 주어 더 이상 뒷돈이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일 것이다.

설사 이번에 선정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년에도 기회가 있고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해 국민에게서 치하를 받게 되면 그 다음해에 더 많은 예산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행정당국의 지원이 없더라도 스스로 고택을 보전하는 방책으로 체험장 운영을 시작하는 것이 지원을 받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김원길 고택문화보전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