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들리에와 조각상으로 장식된 앙드레 김 아틀리에는 늘 화사하다. 이날 그곳이 더욱 더 화사해졌다. 48년 옷 만든 디자이너와 44년 연기한 배우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엇보다 화려하고 고왔다. 거기에 20년 취재한 기자는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박종근 기자]
시간:2010년 5월 3일 잔뜩 찌푸린 오후
장소:서울 신사동 앙드레 김 아틀리에
등장인물:앙드레 김, 윤정희
앙드레 김(이하 김):아, 오셨어요?
윤정희(이하 윤):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김:너무 오랜만이에요.
윤:(영화 ‘詩’) 시사회 때 고마웠어요. 꽃다발도 주시고.
김:그날 감동적이었어요. 사람도 많이 오고. 평이 좋죠?
윤:네, 선생님 상하이 패션쇼도 너무 좋았어요. 반응이 대단했죠?
김:항상 변하지 않는 그 아름다움을 지켜주세요. 정말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전설적 미인이세요.
윤:이창동 감독님이 그러더라고요. 이 주름살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라고요.(웃음)
김:이 감독님이 엄하지만 사람은 좋지요?
윤:어머, 하나도 엄하지 않으세요.
김:무섭게 생겼는데….
윤:어머, 왜 그러세요? 너무 좋으신 분이세요.
윤:(웃음)
김:데뷔는 몇 년도였지요?
윤:1966년 가을에 ‘청춘극장’ 촬영 들어가서 67년 1월 1일에 국제극장에서 개봉했어요.
김:맞아요. 그때 어머니하고 같이 뵌 거 같아요. 파리에 간 것은 언제지요?
윤:74년이었어요.
김:그럼 7년 만에 그만뒀어요?
윤:네, 7년 동안 280편 정도 찍었죠.(웃음)
김:유학 결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윤:아뇨, 저는 데뷔 때부터 5년만 배우 하고 유학가겠다고 했었어요.
김:남편 백건우씨는 어디서 만났어요?
윤:뮌헨에서였어요. 오페라하우스 계단에서. 서로 배우인지, 피아니스트인지 모르고 만났죠. 그이는 미국에서 한국 영화 거의 못 봤고, 나도 막 데뷔한 피아니스트를 알 리 없었죠. 두 번째 만남은 파리에서였어요. 우연히 소르본 대학 다닐 때 친구들하고 중국 레스토랑에 갔는데 남편이 조각가 문신씨하고 들어오더라고요.
김:윤정희씨가 훌륭하다고 느낀 점이 있어요. 어려운 클래식을, 전문적 지식과 깊은 이해 없이는, 끝없는 노력 없이는 오, 엔드리스(endless)…. 이해하기 어려운 클래식 하는 남편을 사랑해 주시고, 내조해 주셔서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만든….
윤:저는 남편을 너무 존경해요. 연습이 끝나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박수를 쳐요. 음악인한테 인정받는 음악인이라는 거죠. 저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클래식을 들으며 공부했어요. 카세트로 녹음해서 들으면서 너무 행복했어요.
김:클래식은 사랑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너무 어려운 분야인데. 그렇죠?
김:두 분의 결혼생활을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라고 많은 사람이 부러워해요. 두 사람 모두 행복하게 살면서 세계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축하드립니다.
윤:다른 욕심이 없어서지요. 일 욕심은 앙드레 김 선생님처럼 많지만 다른 욕심은 없으니 편안할 수 있는 거죠.
김:배우가 되실 생각은 어떻게 했어요?
윤:아버님의 끼를 물려받았나 봐요. 일본대 법대를 나오셨는데 일본 배우들하고 찍은 사진을 봤어요. 그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웠나 봐요.
김:아버님요?
윤:아버님께서 정말 멋쟁이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글로벌하셨던…. 외국 사람들이 부르기 쉬워야 한다고 제 이름을 ‘미자’라 지으셨잖아요(그녀의 본명은 손미자다).
김:대단한 미남이셨던 거 같아요.
윤:사교성도 뛰어나셨어요. 파리에 놀러오시면 프랑스어도 못하시면서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셨어요. 한 번은 아버지가 행방불명돼 난리가 났는데, 알고 보니 몽마르트르 언덕의 벤치에 앉아 노숙자들하고 와인을 마시고 계시더라고요.
김:영화배우가 되겠다니 좋아하셨겠어요.
윤:네, 많이 격려해 주셨죠. 신부님한테도 허락받았어요.
김:오우, 파더(Father)! 김수환 추기경님도 각별히 친하셨지요?
윤:네, 파리에 오시면 저희 집에 모셔 식사를 대접할 정도였지요. 그 분들 모습을 보며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었죠. 저는 구십 살까지 배우 할 건데 그때까지 그 마음 변하지 않을 거예요.
김:파리 생활이 얼마나 로맨틱할지 상상이 돼요. 쿠킹(cooking)은 주로 누가 하세요?
윤:저희들이 직접 하죠. 우리는 가정부를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김:파트타임으로도요?
윤:그럼요. 우리가 다 할 수 있는데 왜 가정부를 써요?
김:맞아요.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쌓일 수 있죠.
윤:우리는 이사할 때 아파트 벽지도 다 우리가 발랐어요.
김:쿠킹은?
윤:반반씩 해요. 한국 음식은 주로 제가 하고, 이탈리아·프랑스·중국 요리는 주로 남편이 해요.
김:음식도 예술적으로 하실 거 같아요.
윤:즉흥적인 요리를 잘하죠. 있는 재료를 가지고… 둘 다 시장 보는 것도 좋아하고. 한 동네에서 30년쯤 살다 보니 상인들이 다 알아봐요. 저희들이 좋아하는 거 알고, “오늘 감이 좋다” “갈치가 싱싱하다”고 권하기도 해요.
김:시장도 가족적이군요.
윤:네, 아파트 이웃들도 너무 좋아요. 연주 여행을 떠나서 한동안 안 보이면 한국에 사는 내 동생한테 e-메일을 보내요. 그러면 동생이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팩스를 보내줘요.
김:한국 영화인들은 자주 만나세요?
윤:신성일, 신영균, 남궁원씨 같은 분들하고 형제같이 지내요. 어제도 신영균씨가 축하 저녁을 사주셨어요. 제가 후배들을 불렀죠. 하루 전에 얘기했는데도 송강호, 전도연 같은 후배들이 기꺼이 나와주더라고요.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님도… 늦게까지 재미있게 놀았어요.
김:어제 장동건-고소영 결혼식 가서 김 위원장님 만났는데 일찍 가시더니 그 모임에 가시느라 그랬군요.
윤:신성일씨하고는 99번 영화를 같이 찍었고, 이제 100번째 영화를 기다리고 있고….
김:신성일씨가 나쁜 일 당했을 때 용기 있게 한 말이 화제가 됐었어요(그녀는 2006년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수감 중인 신성일씨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윤:신성일씨가 직선적이고 꾸밈이 없는 성격이거든요.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 한마디 했지요.
기자:(끼어들며) 오늘 윤정희씨가 멋진 개량 한복을 입고 오셨는데 전문가로서 평을 한번 해주시죠.
윤:어머, 이거 개량 한복 아니에요. 파리에서 산 거예요. 제가 하얀 옷을 즐겨 입는데 앙드레 김 선생님이 늘 하얀 옷을 입으셔서 오늘은 제가 다른 색을 입고 왔어요.
김:윤정희씨는 신인 때부터 자연스러운 멋이 우러나는 의상을 연출했어요. 검은 망토를 멋지게 입으셨던 거 아직도 기억나요. 요즘처럼 인공적인 미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그런 멋이죠.
윤:앙드레 김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언제나 환상적이고 아름답죠. 늘 앞서 가시고, 그래서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인정받으시는… 한마디로 존경합니다.
김:칸 영화제 개막은 언제지요?
윤:개막은 12일, 폐막은 23일이에요.
김:좋은 결과 기대해요. 매일 신문 볼게요.
윤:감사합니다.
J칵테일>> 배우 윤정희
글=이훈범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