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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미 활약 한인배우 오순택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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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배우 오순택씨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007 영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5년)부터 꺼내야겠다.

숀 코너리에게서 제임스 본드 역을 이어 받은 로저 무어가 두번째로 출연한 그 영화에서 오씨는 홍콩 주재 영국 정보원 역을 맡아 로저 무어와 짝을 이뤘다. 1960, 70년대는 전세계 영화팬들이 '007'을 학수고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영화깨나 좋아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인 오씨의 출연은 당연히 사건 같은 화제였다. 오씨는 74년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태평양 서곡'에 주연급으로 나왔고, 국내에서도 인기 높았던 '5-0 수사대'를 비롯해 'M.A.S.H''맥가이버''마르코 폴로' 등의 TV시리즈에 자주 출연했다.

오씨는 할리우드에서 준(準)스타에 해당한다. 스타란 영화 제목에 앞서 이름 자막이 뜨는 배우를 일컫고,제목 다음에 나오는 배우들이 스타 '급', 그리고 'Also Starring'이라고 해서 여러 명의 이름이 뜨는데 그들이 준(準) 또는 준준 스타들이다.

오씨의 위상을 밝힌 것은 소개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한국인이 할리우드라는 황야에 홀로 걸어들어가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으니 그가 스타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터이다.

오씨가 그의 표현을 빌리면 "40년 미국 하숙 생활"을 잠시 접고 귀국해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원장 김광림)에서 연기를 가르치고 있다. 20여년 전 김원장이 UCLA에서 수학할 때 인연을 맺은 오씨를 강권하다시피 해 내년 6월까지 교수로 모신 것이다.

50년대, 학교보다 단성사에 가는 걸 훨씬 좋아했던 오씨는 57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59년 홀로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 도미(渡美)했다.

아까 스타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갖은 고생 끝에 동양계 배우로서 일정한 위치는 차지했으나 국제적 명성은 못 얻은 그에게서 이방인의 어떤 쓸쓸함을 느낀 기자가 "그래 아메리칸 드림은 이뤘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손을 내저었다.

(그의 '갖은 고생'은 예의 접시닦기, 주차장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헬리콥터 부속품 공장 공원, 벌목공, 호텔 바텐더 등을 전전하다 어느 노인부부 집에서 4년간 입주 가정부 생활을 한 것까지 포함한다.)

"미국에서 영화를 배워 한국에서 활용하는 역(逆)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자는 게 애초의 목적이었으나 이도 저도 안된 셈입니다. 알찬 성과를 거둘 단서는 여러 차례 잡았으나 번번이 문 앞에서 돌아선 것이지요. 그러나 한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최선의 한 가지 예는 이렇다. 오씨는 UCLA를 수료하고 지도교수의 권유로 뉴욕에 있는 2년제 배우전문학교(The Neighborhood Playhouse School of the Theatre)로 고속버스 그레이하운드를 72시간 타고 갔다.

그레고리 펙.폴 뉴먼.스티브 매퀸을 배출한 명문으로, 정식 오디션을 거쳐 입학한 동양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동기 입학생은 1백57명이었으나 졸업생은 16명에 불과할 정도로 엄격한 학교였다. 63년 졸업 때 교장은 "지금 16명 중 10년 후 한 명이라도 배우가 돼있다면 학교로서는 성공"이라고 말했다.

10년 후 오씨가 브로드웨이의 '태평양 서곡' 무대에 섰을 때 배우로 활동하는 오씨의 동기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뉴욕의 2년 중 1년은 학교 벤치와 도서관 소파에서 잠자리를 해결했고 나머지 1년은 유명한 제작자 조셉 루빈(엠버시필름 사장)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역경을 이겨내며 형성됐을 오선생의 연기관은 어떤 것일까요.

"연기는 재능이 아니고 집념의 결과입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집념이 없으면 반드시 탈락합니다."

-연극원 강의에서도 그 점을 강조하겠군요.

"학생 중 재능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동안 칭찬을 너무 많이 받은 모양이에요. 신 스터디(장면 공부)가 끝난 뒤 그에게 '너는 실제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큰 배우가 안될 것 같다'고 말했어요. '하는 척'하는 연기는 관객을 감동시키지 못해요. 무대 위에서의 연기 결정은 일상의 충실한 삶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터뷰용으로 몇 자 적었다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다.'연기란 순간의 예술-배우는 순간순간 삶의 단상을 포착해 영원한 시간으로 만들어내는 창작행위를 한다.(중략) 남을 위한 배려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가를 느끼게 하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연기다.

그러기 위해 배우는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기를 갈망해야 하고 그 갈망과 노력이 연기자의 의식구조에 쌓여 느낌과 감정으로 숙성되고 거기에서 빚어져 나온 연기가 관객을 진실되게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후략)'

오씨는 63년 배우학교 졸업 후 65년 연극 '라쇼몽'으로 데뷔했다.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로 유명한 그 작품이다.'라쇼몽'은 당시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으로 상연 중이었는데 LA에서도 한번 해보자고 뜻이 모아져 1년 이상 롱런했다. 현지 매스컴에서 '스타 탄생'이라며 오씨의 등장을 특필하기도 했다.

이런 발판으로 그는 단역이었지만 곧 TV영화에 진출했고(첫 출연작은 일본군 사병으로 미군부대의 음식 깡통을 훔쳐오는 역인데 깡통하고 발만 나왔다고 한다), 70년대에는 '잘 팔리는 동양계 배우'로 성장했다. 이에 앞서 67년에는 UCLA에서 실기부문의 최고학위인 연기 및 극작 석사(MFA)를 받았다.

"농반 진반 섞어서 말하면 80년까지 '버라이어티'나 '할리우드 리포트'같은 유명 연예잡지에 매호 제 이름이 안나온 적이 없었지요. 악역을 많이 했는데 월맹군 역은 졸병부터 높은 장교까지 다 했어요. 60년대 후반 CBS 여자부사장의 도움으로 취업비자가 나와 배우조합에 가입하면서 연기 여건이 잘 풀렸지요.

또 72년까지 '라쇼몽'을 상연한 LA '이스트 웨스트 플레이어 컴퍼니'의 행정감독을 맡아 일했어요. 그러다보니 늘 '내년에는 귀국해야지' 또 '내년에는 꼭 가야지'하다가 40년이 넘어버린 셈이 됐고요."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인기 영화인 '007'에 출연하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007은 영국 영화여서 영국의 배우조합원을 우선적으로 출연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제작사가 영국 배우들을 상대로 오디션을 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자 홍콩배우.일본배우 순으로 오디션을 하다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에 왔어요. 그때 제가 출연한 NBC TV '쿵후' 시리즈를 본 '007' 제작자가 제 에이전트를 통해 연락을 해왔어요. 하우스보이 같은 단역이면 안한다고 하니까 감독 가이 해밀턴이 비중있는 역이라며 '앞으로 출연에 지장을 주는 운동이나 행동은 않는다'는 보험에 들라고 해 사인했지요."

오씨는 연극 외의 출연작이 단역을 포함해 1백편 가량 된다."주연만 했다면 편수를 외우기 쉬울텐데 단역도 꽤 많아서"라며 웃었다.

-유명배우들과 촬영장에 같이 있으면 조연급 한국배우로서 소외감 같은 것도 느꼈을 법합니다.

"없지는 않았지만 어쩌겠어요. 흑인이 주요 배우로 떠오른 것도 90년대 들어서인데 동양인에게 알찬 역할을 줄 리가 없었지요. 그래도 연기엔 온 힘을 다 했습니다. 한번은 '파이널 카운트다운'이란 영화를 커크 더글러스하고 같이 찍었어요. 제가 일본군 정찰기 조종사로 나와 찰스 더닝.캐서린 로스 같은 스타를 인질로 잡고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있었지요. 그 때 제 연기를 러시 필름(편집용 필름)으로 본 커크 더글러스가 '당신 연기가 좋아 질렸다. 내 연기와 비교된다'며 그가 기왕에 찍은 필름을 폐기하고 재촬영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자세로 그는 동양계 배우로서의 자존심을 버린 적이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커크 더글러스의 아들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폴링 다운'의 출연 제의를 사양한 것이 그런 예다. 이 영화에서 생활에 찌든 백인이 인종차별적 분풀이로 한국인 가게에 들어와 물건을 부술 때 한국인 주인이 구석에 숨어버리는데 한국인은 그렇게 졸장부가 아니라는 게 사양의 변이었다. 마이클이니 존이니 하는 예명을 쓰지 않고 그냥 오순택(Soon-Tek Oh)을 고집한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다.

-출연료는 얼마나 돼요. 돈은 좀 모았습니까.

"그건 말씀 못드리겠는데요. 자존심이 절대 상하지 않을 정도는 받습니다. 번 돈을 연극에 안 쏟았으면 많이 모았을텐데."

-주류사회 편입에 한계가 있는 이방인으로서 그런 쓸쓸함은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LA를 중심으로 한국인을 비롯해 멕시칸.스패니시.흑인들이 어울리는 연극 운동을 했습니다.'다인종 연극'이라고 할까요. 연극 중에는 마당놀이가 주류를 이룹니다. LA폭동 후 매년 한 차례씩 3주간 공연합니다. UCLA에서 국악을 가르치는 김동석 교수와 함께 우리의 농부가를 영어로 개사해 부르기도 하고 외국인에게 한국의 북치는 법을 가르쳐 함께 공연하기도 합니다. 한인 2세들이 이 공연에 어울리면서 정체성을 생각하고 이민 1세대의 아픈 사연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보며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해에는 '한인이민 1백년사'를 소재로 한 공연을 끝내고 주차장엘 갔더니 한인 처녀가 울고 있었어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아버지 세대의 아픔을 연극을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슬픔 때문에 운전을 못한다고 말하더군요."

오씨는 할리우드에서 산 하나를 넘은 곳, 디즈니나 워너 등 메이저 영화사들의 스튜디오가 밀집한 버뱅크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는 아내와 둘이 왔다.

<스포츠.문화 에디터>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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