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글밭산책] 버림받을 때의 묘한 쾌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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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연습 니콜라스 보른 지음, 임우영 옮김, 월인, 332쪽, 1만1000원

가끔 소설을 읽을 때 이 작가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아무런 정보없이 선입견없이 읽을 때가 더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카프카의 아버지가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변신』의 벌레 이미지나 『성채』의 강박 같은 것들을 더 잘 이해했을 걸 하는 생각을 했을 때 그렇고,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사람은 그 명성 때문에 객관적 글읽기에 오히려 많은 방해를 받았다.

니콜라스 보른이라는 낯선 독일 작가의 소설은 내가 그를 모름으로 인해 오히려 힘든 독서였다. 그가 68세대 이후 나타난 독일의 주관적 글쓰기를 대표하고 있고 그 이후의 공허를 소설로 그렸다는 짧은 설명을 읽고 나서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고통스러웠다. 주인공은 ‘재미있는’사람들을 좋아하는, 마리아라는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녀는 “마음대로 유혹하고 마음대로 차버릴 수 있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한편 그는 이혼한 아내와 딸이 있다. 그는 가끔 그가 결혼해 살던 그 빈집으로 들어가 본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고 시트도 얼룩져 있었다. 또 방바닥에는 말라 굳어버린 화장지들이 굴러다녔다.” 이 정황은 실상 그가 살고 있는 베를린, 그리고 그의 시대 혹은 그의 내면 풍경과 일치한다. 그는 왜 희망도 없는 그 여자를 사랑할까, 왜 경멸하는 친구와 시간을 보낼까, 그렇게 딸 우르젤을 사랑하면서 왜 그녀와 함께 살지 않을까…. 그는 소설의 한 귀퉁이에서 대답한다.

“그때 나는 완전히 사기당한 것 같은, 아니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처럼 기분좋게 느껴졌다. 그것은 뭔가 고통스러우면서도 근거없는 기쁨이기도 했다”라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들켜버린 듯한 느낌, 그것을 기쁨이라고 표현하는 작가의 냉정한 용기 같은 것이 이 고통스러운 주인공의 여정을 내내 따라가게 만들었다. 그가 사랑하는 마리아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런던에서, 그리고 여기 베를린에서 여전히 수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하지만 그는 마리아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한다. 그녀가 그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다해 그를 붙잡아두려 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사람이 사랑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랑에 대해 이런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이란 당장 질 안의 장밋빛 점막을 떠올리게 하는 섬뜩한 단어이기도 했다. 평생 질퍽한 느낌, 더 이상 자세히 관찰할 것이 없는 것을 쳐다보는 것, 가정에서 은밀하고도 활력을 잃게 하는 평화, 침대보, 탁자보, 속옷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희망을 가지는 대상은 “지루한 것이 제일 싫은” 딸 우르젤이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그는 “항상 달라지고 싶었고 기억에 남을 만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인식은 비참하다, “난 너무 오랫동안 내 인생을 괴롭혀왔고, 뜻하지도 않게 불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정상이라고 여기려 했었다. 그래, 이성적이라고 여기려 했었다.(…) 내 몸속의 여러 기관들은 벌써 불구가 되고 말았다. 가망 없는 내 심장, 간, 이젠 쫑긋거릴 수도 없는 귀, 낯설고 매운 냄새에 벌렁거리지도 않는 코, 쳐다봐도 희망없는 이 눈….” “여자한테 붙어먹고 사는” 친구 라스키가 죽고 마리아가 또 다른 사진작가와 관계를 맺게 되자 주인공은 그녀에게 이별을 고하고 마지막 희망인 글쓰기를 시작할 뿐, 이 소설 속에서는 끝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친구 라스키가 죽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하던 짓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마치 떨어져 보도에 뒹구는 낙엽처럼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다닌다. 그렇지만 이리로도 갈 수 없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낮과, 잠을 잘 수도 없고 잠을 자지 않을 수도 없는 밤이 있는 것이다. 차라리 완전히 버림받아버리고 싶을 때, 모든 것이 완전한 사기였다고 통쾌하게 생각해 버리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쓸쓸한 책, 그것이 『이별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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