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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자본 M&A 위협 기업들 떨고 있다] 中. 달아나는 국부, 부진한 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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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업들은 외국인 주주의 경영 간섭과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중앙일보와 대한상공회의소가 코스피 200대 기업(증권거래소 상장기업 중 우량 2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외국인 주주와 적대적 M&A 위협의 존재에 대해 '경영차질 등 부작용이 더 크다'고 응답한 기업이 62.8%(94개 응답기업 중 59개사)에 달했다. 지배구조 개선 등 긍정적 요인이 더 많다는 답변은 37.2%에 그쳤다. 이 조사는 지난 12~15일 실시됐다.

또 매출액 2조원 이상 대기업들은 4개 중 1개 기업꼴(25.8%)로 외국인 주주로 인해 경영애로를 겪은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애로사항으로는 지나친 배당 요구(53.8%)가 가장 많이 꼽혔으며 사업 수정, 지배구조 개선, 임원 교체 등의 순으로 지적됐다. 외국인 주식투자의 긍정적인 측면은 부정할 수 없다. 외국인 투자가 외환위기 극복에 큰 도움을 준 것은 물론 국내 기업의 경영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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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단기 수익과 적대적 M&A를 겨냥한 외국계 펀드들의 지나친 공세다. 이들은 이미 우리 경제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기업들은 이들의 지나친 배당 요구와 내부자금 유출에 시달리고 있다. 자사주 매입 등 경영권 방어에 엄청난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 유망기업들은 증시 상장을 꺼리고, 상장기업들은 폐지 유혹을 강하게 받고 있다. 투자 잠재력도 떨어져 극심한 투자 부진의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 유출되는 국부=지난 8월 24일 브릿지증권은 주당 1000원씩 주고 전체 주식의 67.6%를 줄이는 내용의 유상감자를 결의했다. 자본금을 줄이기 위해 회사 돈으로 주주들의 주식을 사 이를 소각하겠다고 한 것이다. 브릿지증권의 대주주인 외국계 펀드 BIH(지분 71%)가 유상감자로 받은 돈은 1300억원. 투자한 돈 2200억원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다. 이 회사 노조는 그 전에도 BIH가 네 차례의 유상감자로 647억원을 챙겼다고 주장한다. 대주주 지분은 그대로 유지한 채 투자한 돈의 88%를 회수한 것이다.

반면 회사는 감자 대금을 조달하기 위해 서울 을지로와 여의도 사옥을 팔았다. 대규모 명예퇴직으로 직원도 절반으로 줄었다. 또 BIH는 지난 9월 초 회사 매각을 추진 중이라고 증권거래소에 공시했다. 투자 원금은 거의 회수했고, 이제 회사 매각 차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본사를 둔 BIH는 1998년 국내에 들어와 리젠트증권과 일은증권을 차례로 인수, 이를 합병해 2002년 브릿지증권을 만들었다.

만도의 대주주인 JP모건은 지난해 12월 전체 지분 33.46%를 액면가(1만원)의 세 배 가까운 2만9200원에 유상감자하는 방식으로 760억원을 회수했다. 지난 4년간 2700억원을 투자하고 한번도 배당을 받지 않아 일부 수익을 회수했다는 설명이다. OB맥주의 대주주인 벨기에 인터브루사도 최근 유상감자 방식을 통해 1500억원의 투자금을 회수하기로 했다.

경영권이 취약한 기업의 주식을 사 모은 뒤 대주주에게 비싼 값에 되파는 '그린메일'도 기업들을 괴롭히고 있다. 미국계 아팔루사 펀드는 98년 1월부터 효성T&C 주식 17.8%를 매집한 뒤 그해 7월 10일 단 하루 만에 주식을 몽땅 팔고 한국을 떠났다. 220억원의 투자 원금은 물론 50억원의 투자 수익도 챙긴 상태였다. 아팔루사는 '효성이 빚덩이 계열사를 통합하려는 것은 기업을 망하게 하는 처사'라며 구조조정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주식을 팔았다. 하지만 주식을 사들인 곳은 모두 효성물산 등 효성 계열사였다. 또 매각 직전 주가는 8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다. 증권 전문가들은 회사의 경영권을 위협한 뒤 비싼 값에 되파는 전형적인 '그린메일'이라고 평가한다.

외국인 주주들의 고율 배당 압력도 심각하다. 에쓰오일(옛 쌍용정유)은 중동의 한 석유자본에 지분을 매각한 직후인 2000년부터 연간 순익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배당금으로 지출했다. 이 회사는 99년 2800억원을 벌어 3분의 1인 995억원을 배당했다.

그러나 2000년엔 순익의 16배인 872억원, 2001년엔 8배인 1528억원을 배당했다. 2002년엔 배당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가를 조작하고 분식회계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조사를 받기도 했다.

외국계가 대주주인 메리츠증권과 서울증권도 최근 한 해 이익의 배가 넘는 금액을 배당해 노조와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상장기업들의 배당금이 급증하고 있다. 2001년 3조3290억원에서 지난해는 이보다 세 배 이상 늘어난 7조2391억원에 달했다.

기업들이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드는 비용도 상당하다. 올 상반기 국내 상장사들은 '장사로 번 돈' 20조5000억원 중 18%인 3조6000억원을 자사주 매입에 사용했다. 삼성전자 측은 "최근 2년간 배당 2조원, 자사주 매입 4조원 등 모두 6조원을 주주에 환원해 줬다"면서 "외국인 주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매우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부진한 투자=최근 대기업들이 돈을 쌓아두고도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외환위기 전인 93~97년 5년간 매출액 600대 기업의 투자 증가율은 18.2%였지만 이후 5년간은 3.6%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 현재 상장기업들이 20조원 가까운 현금을 갖고 있는데도 투자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재계는 그 이유를 외국인 주주의 경영 간섭과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한 현금 비축에서 찾고 있다. 전경련 현명관 부회장은 "고율 배당을 하려면 그해에 높은 수익을 올리는 단기실적.안정성 위주 경영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먼 미래를 내다보는 수종산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 등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밝혔다. 삼성금융연구소 이상묵 상무는 "기업이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것은 돈을 조달하기 위해서인데, 한국 증시는 이미 이런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지난해의 경우 기업들이 유상증자를 통해 증시에서 조달한 돈(7조1662억원)보다 배당금(7조2391억원)이 더 많아졌다. 여기에 자사주 매입과 유상감자 등을 통한 주식 소각을 합치면 증시의 자금조달 기능은 유명무실한 셈이다.

서강대 노부호 교수는 "투기 자본의 고액 배당.유상감자.자사주 매입 등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기업이 연구개발이나 종업원 교육 등 미래를 위한 투자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월 SK텔레콤이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가 외국인 주주들을 포함한 주주들의 반발로 철회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나현철 기자

◆ 그린메일=대주주 지분이 낮은 기업의 지분을 장내에서 사들인 뒤 경영권을 위협해 대주주에게 장외에서 비싼 값에 되사도록 하는 행위.

◆ 유상감자=회사가 자본금을 줄이기 위해 돈을 주고 자기 회사 주식을 산 뒤 이를 소각해 없애는 것. 기업 규모를 축소하거나 합병 때 회사의 자산상태를 조정하기 위해 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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