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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깊은 의미는 침묵 속에 있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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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02면

유진규(58). 그를 설명하는 말엔 모두 ‘마임’이 들어간다. 마임 1세대, 마임의 산증인, 마임의 아이콘 등이 그를 부르는 말이다.그리고 그의 공식 직함은 ‘춘천마임축제 예술감독’이다. 올해로 22회째를 맞는 춘천마임축제는 그가 만들었고, 그가 키운, 그의 작품이다.그리고 호반의 도시, 춘천을 마임의 도시로 만든 수훈갑이다. 그를 춘천에서 만나 마임 이야기를 들어봤다.한국의 마임 성장사와 그의 인생 이야기는 한 덩어리였다.

2010 춘천마임축제 5월 23~30일, 22년간 축제 이끈 유진규를 만나다

-마임이 뭔가.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언어를 배제한 몸의 표현이다. 표현 방법은 굉장히 다양하다. 무대 공연뿐 아니라 저글링·아크로바틱·마술·서커스 등을 다 마임에 포함시킬 수 있다. 형식이 어떻든 마임은 ‘서민적’이란 특징을 갖고 있다. 일반 무용이 궁중의 공연예술에서 시작됐다면 마임은 서민들의 공간인 광장ㆍ시장에서 펼쳐졌다. 마임은 극장 공연 역시 클래식한 공연장이 아니라 서민적인 공연장에서 하는 게 어울린다.”

-최종 학력이 건국대 수의학과 중퇴다.
“대학 생활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연극반에 들어갔다가 연극에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 수의학 공부는 나중에라도 할 수 있지만 연극은 지금 안 하면 못할 것 아니냐고 생각해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처음부터 마임에 관심이 있었나.
“1971년 극단 ‘에저또’에 들어갔다(‘에저또’는 말이 막힐 때 내뱉는 소리, ‘에∼’ ‘저∼’ ‘또∼’를 모아 만든 조어다). 언어보다 몸의 움직임이 중심인 실험연극·전위연극을 주로 하는 극단이었다. 그곳 연기 수업 중에 팬터마임이 있었다. 말 없이 자기 생각을 표현해야 했는데, 잘한다며 연출가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마임과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마임으로 진로를 정한 계기가 있나.
“군대에 다녀와 연극을 할까, 마임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 마임은 정말 미개척 분야였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게 진정한 예술가의 길 아니겠느냐’는 생각에 마임으로 길을 정했다.”

-연극도 배고픈 장르인데, 마임은 더했겠다.
“어차피 예술로 생계를 유지하는 건 아니지 않나. 지금도 대학로 연극인 90%가 연극으로 밥벌이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들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게 예술가의 복인가 싶다. 마임은 희귀 장르여서 이점도 많았다. 언론과 평론가들의 관심을 쉽게 끌 수 있었다. 76년 충무로 에저또 소극장에서 첫 작품인 ‘육체표현 유진규 무언극’을 무대에 올렸을 때도 평단의 화제가 됐다.”

-한국 마임의 개척자가 된 셈인데, 줄곧 독학으로 마임을 익혔나.
“마임이라고 하면 대부분 서양의 팬터마임을 떠올리면서 피에로ㆍ광대를 연상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마임을 ‘육체표현’이라 규정하고, 내 스타일의 마임을 만들어 가기로 했다. 마임을 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아주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사실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적 이미지를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디테일한 묘사는 스토리가 있으니 관객들이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내 나름의 주관적인 세계를 몸짓으로 표현하고 싶어 두 방식을 다 활용했다. 대중이 스토리를 원하기 때문에 그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일반의 이해를 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어서다.”

-춘천마임축제는 어떻게 시작했나.
“81년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았을 때였다. 마임이고 뭐고 다 털고 조용히 살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춘천에서 처음엔 소를 키웠고, 소 값이 폭락한 뒤엔 시내에서 카페를 운영했다. 88년 재기 공연을 할 때까지 생활인으로 살았다. 다시 마임을 시작할 즈음 마임 하는 후배들과 자주 만나게 됐다. ‘한국 마임을 일으킬 방법이 없을까’란 고민도 함께 나눴다. 축제 아이디어가 그때 나왔다.”

-스케일 큰 아이디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마임을 하는 사람은 다섯 명 정도였다. 그 다섯이 모여 한국마임협의회를 만들었고, 내가 초대 회장이 됐다. 협의회의 활동 원칙은 이렇게 정했다. ^매년 축제를 하고 ^정보지 ‘마임’을 매달 발행하고 ^매달 대학로 거리공연을 하면서 ^비원 옆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매달 마임 정기 발표회를 한다는 것이다. 그 원칙들은 거의 그대로 지켜졌다. 나는 춘천마임축제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춘천마임축제는 마임 하는 사람들이, 한 줌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스스로 살겠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든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생성’이 다른 축제와의 차이점이다.”

-마임축제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어땠나.
“89년 축제 첫해 행사는 ‘한국마임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서울에서 열었다. 언론이 굉장히 우호적으로 다뤄 줬다. 한 장르를 대표하는 가장 큰 행사로 인정하고, 한국미술제나 한국무용제와 동급으로 보도해 준 것이다. 행사가 끝난 뒤 춘천 MBC에서 마임페스티벌의 대표작들을 스튜디오에서 녹화해 방송으로 내보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 왔다. 그래서 그해 ‘제1회 한국마임페스티벌 초청 공연’이란 이름으로 춘천에서 다시 공연을 하게 됐다. 그리고 90년부터 페스티벌을 아예 춘천으로 옮겼고, 95년부터는 행사 이름도 ‘춘천국제마임축제’로 바꿨다(현 명칭 ‘춘천마임축제’는 2002년부터 사용했다).”

-서울이 그래도 문화의 중심지인데, 서울을 떠나며 미련은 없었나.
“서울에서 아무리 마임을 해 봐야 연극이나 무용같이 ‘큰’ 장르 틈바구니에서 티나 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데 가서 씨를 뿌려 보자’ 했다. 작은 도시 춘천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마임축제를 열어 춘천을 마임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그리고 사실 아비뇽ㆍ에든버러ㆍ칸 등 세계적인 예술축제가 열리는 곳은 다 인구 5만 명도 안 되는 소도시다. 우리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비전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춘천은 서울과 가깝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도시 아니냐.”

-꿈이 이루어졌다. 이제 춘천이 마임의 도시가 되지 않았나.
“춘천의 문화예술인ㆍ문화애호가들이 먼저 마임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뭔가 새로운 게 춘천에서 시작되는구나’란 호기심이 컸던 것 같다. 축제 초창기부터 객석 500석이 꽉 찰 만큼 반응이 좋았다.”

-축제가 외형적으로도 커졌다.
“처음엔 하루였던 축제 기간도 이제 8일로 늘었다. 축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 숫자도 한 해 10만 명에 이른다. 시에서 예산도 지원받는다. 95년 2000만원으로 시작해 올해는 3억원으로 늘었다. 2007년부터 문화관광부 선정 ‘최우수 축제’가 됐고 영국 런던마임축제, 프랑스 미모스마임축제와 함께 세계 3대 마임축제로 꼽힌다.”

-솔직히 도시마다 축제 없는 곳이 없다. 춘천마임축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뭔가.
“대부분의 축제가 공연의 ‘예술성’을 중심에 놓고 행사를 치르지만 춘천마임축제는 축제의 ‘난장성’을 함께 추구한다. 생소한 예술, 마임을 친근하게 전하는 장치다. 축제는 1년에 한 번 미친 듯이 놀 수 있는 자리가 돼야 한다. 그래서 ‘아수라장’ ‘미친 금요일’ ‘도깨비 난장’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시민들과 함께 밤을 꼬박 새워 물 붓고 불 피우며 노는 시간이다.”

-올해 춘천마임축제는 5월 23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올해 행사의 특징은.
“‘신화’를 강조한다. 원래 축제는 신화와 한 몸이다. 인간들이 자기네들끼리 즐기고 놀기 위해서만 축제를 벌이는 게 아니다. 하늘에 바치는 인간의 몸짓이 바로 축제이고, 여기엔 반드시 신화가 개입돼 있다. 현대 축제에서는 그런 ‘신화성’이 거의 사라졌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늘 우주와 소통하고 우주의 힘에 의지하려는 심리가 남아 있다. 이를 어떻게 끄집어내 축제로 연결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 ‘우다마리와 공지어9999’란 신화를 만들었다.”

-없는 신화를 지어냈다는 얘긴가.
“춘천 공지천의 ‘공지어 설화’를 모티브로 해서 새로 만든 신화다. 퇴계 선생이 지푸라기를 썰어 공지천에 던졌더니 공지어가 됐다는 게 공지어 설화다. 여기에 우주에 살고 있던 ‘깨비’들이 우주여행을 하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 공지천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된 깨비들이 매년 5월 말 공지천에 다시 모여 고향 우주를 그리워하는 축제를 벌인다는 게 신화의 줄거리다. 축제의 각 행사도 신화 내용과 연관해 진행된다. 지금이야 사람들에게 생소한 신화일 테지만 한 10년 계속 알리다 보면 어느새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리라고 생각한다.”

-춘천을 마임의 도시로 만든 데는 ‘마임의 집’도 한몫했다. 4월 24일 마지막 공연을 했는데.
“내가 한림대 앞에서 운영하던 카페에서 98년 ‘마임의 집’을 시작했다. 정기적으로 마임 공연을 하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2년 반 정도 꾸려 가다 적자 누적으로 문을 닫았다. 2002년 춘천예술마당 내 창작관에서 다시 문을 열어 매주 토요일 마임 공연을 해 왔다. ‘토요일 춘천에 오면 마임을 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데 ‘마임의 집’ 역할이 컸다. 4월 24일 333회 공연을 끝으로 ‘마임의 집’은 문을 닫는다. 5월부터는 효자동에서 새로 문을 여는 ‘축제극장 몸짓’에서 매주 토요일 마임 공연을 한다.”

-축제 진행과 마임의 집 운영을 총책임지면서도 마임 공연 무대에도 꾸준히 서고 있다. 몸 관리는 어떻게 하나.
“나는 나 자신을 내 몸으로 보여 주겠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선다. 꾸며서 억지로 보여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니 특별한 신체 훈련도 필요 없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몸을 꾸미거나 기술적인 훈련을 하지 않는다. 내 몸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으면 족하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몸이라는 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인다. 줄넘기를 500번 해야 하고, 재즈댄스도 배워야 하고… 그런 건 아무 소용없다. 그런 틀에 박힌 예술교육이 상상력을 차단한다.”

-평생을 마임에 바친 셈이다. 마임의 매력을 정리해 말한다면.
“우리는 자기를 표현하거나 남과 교감하는 수단으로 언어나 문자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갖고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 바로 침묵의 세계가 언어ㆍ문자 못지않은 표현ㆍ교감의 수단이 된다. 우리 삶의 깊은 의미가 침묵의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그걸 일깨워 주는 게 말 없는 마임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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