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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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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죽은 이를 애도하며 쓴 시를 ‘만시(輓詩)’라고 한다. 망자를 묻은 생자의 애가(哀歌)다. 조선시대에는 만시 짓기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권세가가 죽으면 대문 앞에 사람들이 지어바친 만시가 수북이 쌓일 정도였다니.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미리 기리는 ‘자만시(自輓詩)’도 있었다. 만시 중 으뜸은 자식을 앞세운 부모가 짓는 ‘곡자시(哭子詩)’가 아닐까 싶다. 영조 때 중인 김상채는 일곱 살 아들을 홍역으로 잃고 이렇게 울었다. “너는 내가 죽어도 곡하지 못할텐데/내가 어찌 네가 간다고 통곡해야 하느냐/이 통곡은 또 무슨 통곡이란 말이냐/부자간 골육이 떨어져 나가는 이 마당에.” 이듬해 아들의 생일날 그는 다시 울었다. “지난해 바로 오늘 널 데리고 놀았는데/올해 그 오늘은 아득히 흔적조차 없구나.”(전송열, 『옛사람들의 눈물』)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어린 자식을 폐렴으로 잃고 나서 쓴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은 너무나 유명하다. 모더니즘 시인 김광균의 ‘은수저’도 그가 아들을 먼저 보내고 쓴 시라고 한다. “산이 저문다/노을이 잠긴다/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불러도 대답이 없다.” 은수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라는 뜻이다. 자식이 늘 앉던 곳에 그런 은수저만 남았다니, 어찌 눈물 고이지 않을 수 있으랴.

자식 잃은 슬픔은 처참하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는 자식을 잃고 너무 슬픈 나머지 눈이 멀어버렸다. ‘상명지척(傷明之戚)’이란 말이 생긴 연유다. “짧은 유서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버린 아들은 내 옆구리에 절벽 하나를 만들었다.” 중학생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난 후 올 초 아들의 영혼과 고비사막을 여행하는 소설 『낙타』를 발표한 정도상 작가의 토로다. 옆구리에 까마득한 절벽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건,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일이다.

천안함 희생자 46명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누군가의 남편이고 오빠이고 동생이고 조카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금쪽같은 아들이었을 그들이다. 부모는 “찬란한 태양이 되거라, 없어지지 않고 매일 뜨지 않느냐. 새가 되어 훨훨 날아라, 우리 집에도 찾아오너라”고 했다(조지훈 상병 부모, 본지 4월 29일자 2면). 가슴으로 쓴 만시다. 눈물의 시다.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