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3권분립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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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간교하면서도 부패하고 타락한 의회민주주의로부터 유럽을 구하는 길은 야만적이지만 싱싱한 나치즘의 피를 유럽 정치에 수혈하는 길밖에 없다-이는 드리외 라 로셀이나 크누트 함순처럼 나치를 지지한 당시의 유럽 지성인들이 흔히 내세우던 구실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넘어간 대중정서는 파시즘이 입법부를 무력화시키고 행정부 독재로 나아가는 데 넓고 탄탄한 길이 되었다.

*** 입법부 위상 처참하게 추락

요즘 일부 매스컴, 특히 공영방송 매체를 통해 보면 이 나라에서 국회와 국회의원처럼 한심한 제도와 가치없는 인물들도 없어 보인다. 며칠째 방송이 헤드라인 뉴스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이 나라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사람들이 비싼 세비를 받으며 낡고 생산성 없는 제도에 기대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는 말 같다. 방송마다 조금씩 뉘앙스를 달리하고는 있어도 여야가 한꺼번에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꼴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하기야 돌이켜 보면 국회와 국회의원이 격하되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근년의 처참한 추락은 아무래도 지난 국회의원 총선 전 몇 달 매스컴을 도배하다시피 한 검찰의 '차떼기'수사 발표 이후로 보아야 할 듯싶다.

기획된 것이라면 너무도 절묘한 단계적 확대와 이른바 '700억 대 0><1000 몇 백억 대 90 몇 억>하는 식의 대비를 통해 먼저 치명상을 입은 것은 당시의 다수당이던 지금의 야당이었다. 하지만 덮고 덮어도 못생긴 우리 형수 다리는 다 덮지 못해, 결국은 당시의 소수당이던 지금의 집권여당에도 그 부메랑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 유산은 17대 국회에도 전해져 소수의 초선의원을 빼면 국회와 국회의원은 국민에게 정경유착과 부패의 이미지로 깊이 각인되었다.

거기다가 지난 개각은 국민 머릿속에 있는 입법부의 위상(位相)을 한층 격하시켰다. 과반수 의석의 여당 전(前)현(現) 대표를 나란히 데려다 국무위원으로 앉히고 선대(選對)위원장을 국무총리로 세운 일이 그랬다. 국회의원 3분의 1을 행정 수반이 임명하던 유신 때만큼은 아니지만, 왠지 입법부가 왜소해지고 국회의원은 행정부의 수족으로 쓰이는 듯한 인상을 지울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기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한 여당의원이 헌법재판소를 맹렬히 비난함으로써 사법부 격하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의원은 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사법쿠데타'로 규정하고, 거기 참여한 재판관들의 자발적인 퇴진을 요구했다. 듣기로는 그보다 더 심한 위협이 되는 제안을 내놓으려다가 당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헌법재판소가 원용(援用)한 관습헌법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개념이고, 예상 밖의 신속한 결정과 논의의 단호함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데가 있다. '천도(遷都)'란 말까지 써가며 벌써 2년째나 기정사실화돼 추진되어온 수도 이전이 백지화된 데서 오는 정부.여당의 부담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 이전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 선거에서 내건 공약이었으며, 이행 주무부서도 거의 행정부에 있다. 거기다가 헌법재판소는 그러잖아도 그 위헌 결정 때문에 관변화(官邊化)된 일부 시민단체나 특정 정권 추종세력에게 충분히 시달려 왔다. 그런데 다시 여당 국회의원이 격한 표현을 써가며 공격하는 걸 보니 이번에는 행정부가 입법부를 수족 삼아 사법부 격하를 시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어떤 이는 현 행정부나 그 수반인 대통령의 위상도 그리 대단하지 못함을 들어 그와 같은 의심을 쓸데없는 걱정이거나 정치를 지나치게 음모적으로 본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해서 입법부.사법부.행정부가 다 같이 진창으로 가라앉고 있을 뿐이라 해도 우리에게 위로될 일은 하나도 없다.

*** 둥지 썩는데 알이 성하겠나

삼국지에 보면, 북해(北海) 공융이 조조에게 죽고 멸문(滅門)을 당할 즈음 누가 공융의 두 아들에게 멀리 달아나기를 권했다고 한다. 듣고 난 둘이 입을 모아 말하였다. "둥지 깨진 새집에 알이 성하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그리고 조용히 조조가 사람을 보내 잡으러 오기를 기다려 죽음을 당했다.

삼권분립은 민주주의를 부화시키고 기르는 둥지다. 그 둥지가 깨지거나 모조리 썩어내려 앉는데 알이 어찌 성하겠는가.

이문열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