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아랍식 냉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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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랍어는 자음이 28개나 되지만 모음은 아.이.우 세개 밖에 없다. 아랍인들은 에와 이, 우와 오 등을 구분하지 않아 오사마와 우사마, 오마르와 우마르, 모하마드와 무하마드를 같은 말로 알아 듣는다.

단어의 모음순서를 바꿔 다른 말을 만들기도 한다. 예로 책을 뜻하는 키타브의 모음 순서를 바꾼 카티브는 '책을 쓰는 사람' 이라는 의미다. 아랍인들은 이렇게 단어의 운(韻)을 조금 틀어 뜻을 바꾸는 방식으로 풍자와 익살을 즐겨왔다.

문제는 풍자를 하다 목숨을 잃기도 한다는 점이다. 1992년 이집트 인권운동가 파라크 포타는 과격파 이슬람원리주의 단체 '가마트 이슬라미야' (이슬람 그룹)의 운을 바꿔 '가마트 잘라미야' (어둠의 그룹)라고 불렀다가 암살됐다.

원리주의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결집을 추진했던 포타는 바른 말을 잘 하기로 유명했다. 당시 원리주의자인 압델 하미드 키쉬크는 "남자 이슬람교도가 천국에 들어가면 성기가 영원히 발기하며 어린 소녀들과 지낼 수 있다" 고 설교하고 다녔다.

그러자 다른 학자들이 "영구 발기는 힘들고 현세보다 조금 더 오래 발기할 순 있을 것" 이라고 반박해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포타는 "컴퓨터.우주과학.유전공학이 지배하는 20세기 말에 우리 이슬람교도들이 우려하는 것이 고작 그런 것이냐" 며 비판을 가했으며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의 불행 앞에 아랍인들은 "목을 잘 간수하려면 머리를 숙여야 한다" 는 반응을 보였다. 오랫동안 독재자와 외세에 시달려온 탓에 힘든 문제에 정면대응을 삼가고 체념과 냉소로 일관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10세기의 이집트 시인 알 무타나비는 대지진이 일어나자 "대지가 위대한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 춤을 췄다" 는 시를 써서 압제자인 재상에게 바쳤다. 백성들은 "지도자에게 천벌이 내린 것" 이란 시인의 은밀한 메시지를 알아채곤 배를 잡고 웃었다고 한다.

중동지역의 민주화가 지연되면서 국민들은 아직도 권력에 이런 냉소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를 틈타 이슬람 과격파들은 정부의 무능.부패를 공격하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테러리즘에 맞서려면 이스라엘만 일방적으로 지지해온 미국의 중동정책도 변화해야겠지만 아랍국가들도 권력과 국민이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국내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채인택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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