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중앙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거울아, 거울아'(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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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9면

찜질방의 황토벽에는 박하와 인진쑥궁과 같은 한약재가 걸려 있다. 옥돌을 깔아놓은 바닥과 달리 벽과 천장은 황토로 된 가마형이다.

궁륭의 가운데는 군데군데 금이 가고 황토가 부스러져 내린 게 눈에 띈다. 천장을 보고 있으려니 흡사 무덤 속에 누운 것 같다. 고개를 돌려 자고 있는 여자들을 본다. 여자들은 여전히 죽은 것처럼 보인다.

무덤 속이라도 이렇게 여럿이 누우면 무섭지 않을 것 같다. 문득 손가락을 여자들의 코 끝으로 가져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른쪽 벽면에 시계가 보인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나 있다.

여기서 밤을 지내는 것도 괜찮겠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잠들어 있는 여자들도 어쩌면 밤을 지낼 생각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시각 저렇게 태평스레 잠이 들 리가 없다. 검은 아이라인도 아구찜을 먹고 난 뒤 찜질방으로 올 것이다.

여기에 오면 찜질방에서 두어 시간 몸을 지지다, 자다하는 걸 여자는 알고 있다. 원적외선 불빛이 여자의 몸에도 붉게 떨어진다. 붉은 빛에도 눈이 피곤하지 않다.

진짜 원적외선인지도 모르겠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등으로 올라온 열기가 기분 좋게 몸에 퍼진다.

여자의 몸과 신경이 공기 중으로 증화되듯 가벼워진다. 이런 게 죽음의 느낌이라면 죽는 일도 그리 두렵지 않단 생각이 든다.

여기 오길 잘 했다고 여자는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집에 있어봐야 음식 생각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 시각엔 더 심하다. 하루 한 번의 구토를 위해 여자는 저녁 한 끼만을 먹는다.

그 외의 시간은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음식을 지우고, 지운 음식을 다시 떠올리며 보낸다. 오래 참은 만큼 여자의 식욕은 끔찍하다.

사우나에 오기 전에도 자장면과 치킨을 시키고 피자를 두 판이나 삼켰다. 먹는다는 표현은 여자에게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맛도 느끼지 못할 만큼 빠르게 음식을 여자는 식도로 넘긴다.

남편의 잦은 부재가 여자에게는 다행인지 모른다. 음식을 삼킬 수 없기는 남편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삼켜보려 해도 도저히 삼켜지지 않는다. 예외란 없다. 일년의 삼분의 이를 3만 피트 상공의 비행기 안에 있거나, 여기와 낮밤이 바뀐 곳에 남편은 있다. 아침에도 비가 부슬거리는 북구의 도시에서 남편은 전화를 걸어 왔다.

여자가 새모이 만큼도 먹지 못한다고 여자의 남편은 걱정을 한다. 그러나 여자는 레귤러 피자를 일곱 판까지 먹은 적도 있다. 가속도가 붙은 기관차처럼 여자의 식욕을 멈추기란 불가능하다.

자장면과 치킨을 먹고, 두 판째의 피자를 삼키던 여자는 불현듯 먹는 걸 멈췄다. 그리고는 입으로 들어가던 피자를 발로 으깬 뒤 침을 뱉었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재떨이의 담배꽁초와 같이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다. 콜라를 양껏 마신 다음 복근을 이용해 먹은 것을 변기에 게워냈다. 콜라를 마신 뒤라야 게워내기가 편하다. 그렇다고 식도의 통증이 덜해지는 건 아니다.

변기에 쌓인 토사물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변기의 레버를 내렸지만 냄새는 악착같이 여자를 따라다닌다. 얼굴을 헹군 다음 여자는 이를 닦는다. 칫솔질이 유난히 조심스럽다. 구토 뒤에 이를 닦으면 치아손상이 훨씬 빠르다.

그걸 알면서도 냄새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입 안을 헹구고 난 여자는 탈진해 소파에 구겨진다. 홈쇼핑 채널로 고정된 티브이에서는 지방분해 특허를 받았다는 다이어트 약품이 나온다. 쇼핑 호스트가 물이 담긴 유리컵에 식용유를 쏟아 붇는다.

거기다 광고 약품을 부어 막대기로 젓는다. 곡물가루 같아 보이던 약품이 식용유를 흡착해 무겁게 컵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쇼핑 호스트는 여느 다이어트 식품과는 다른 유명제약사의 약품임을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여자의 머리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피자 생각뿐이다. 티브이에 집중하려고 해도 어느새 시선은 쓰레기통에 박혀 있다.

담뱃재에 범벅이 된 피자는 형편없이 짓이겨져 있었다. 담뱃재를 털어내고 여자는 피자를 한 입 베어 문다.

마른 눈물 한 방울이 여자의 눈 밑에 달린다. 돌연 여자는 베어물던 피자를 내동댕이치고 정신없이 목욕가방을 챙겼다.

여자는 깜박 졸았다고 생각하며 잠을 깬다. 벽시계에 눈이 간 여자는 깜짝 놀란다. 새벽 세 시다. 그렇게 길게 잤을 리가 없다. 잠이 덜 깬 탓이라 여기며 다시 시계를 쳐다본다. 시침은 여전히 세 시에 가 있다.

잠깐 눈을 붙인 것에 불과한 데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시계의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자고 있던 여자들도 보이지 않는다. 여자들의 자리엔 여자들이 베고 있던 침목(枕木)이 뎅그마니 놓여 있다.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자 여자의 아랫배로 땀방울이 굴러 내린다. 수건이 흥건히 젖어 있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한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찜질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여자는 쭈볏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이상하다. 뭔지 몰라도, 별스러운 느낌이다. 한참을 생각없이 서 있다, 마침내 목욕탕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탈의실의 시계 역시 새벽 세 시가 넘어 있다. 새벽 세 시가 아니라 오후 세 시가 아닐까, 여자는 잠시 헷갈린다.

탈의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냉장고 옆 소파에 늘 몸을 부리고 있던 주인여자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아이라인이 아구찜을 먹던 자리엔 그릇 그대로 신문지에 덮여 있다. 그것말고는 모든 게 제자리에 단정히 정돈되어 있다.

옷장의 열쇠도 결번 없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바닥도 걸레질을 했는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 벌써 정리들 하고 가 버렸나. 분명 심야영업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닌가 문득 불안해진다. 아파트로 돌아갈 일이 까마득하다. 걸으면 십분 안팎에 불과한 거리지만 그래도 새벽 세 시의 거리를 걷는다는 게 내키지 않는다.

어차피 새벽 손님들이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여자는 생각한다.

유리문을 통해 탕 안을 들여다 본다. 온탕 안에 누가 있다. 그럼 그렇지, 여자는 안도의 숨을 하르르 내쉬며 유리문을 민다. 탕 바닥이 물기없이 건조하다. 꽤 빨리 손님이 빠진 모양이다.

다시 한번 여자는 너무 오래 잤다고 생각한다. 샤워기를 틀어 찜질방에서 흘린 땀을 씻어낸다. 머리를 감고 흐려진 거울을 닦으며 여자는 온탕을 흘끔 본다. 온탕에 들어앉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여자의 머리는 겅충한 단발이다. 저 정도라면 귀밑 2센티 쯤에서 잘린 게 틀림없다. 요즘엔 아무도 저런 단발을 하지 않는다. 여자가 중학교 교복을 입던 시절, 생활지도 선생의 가위 밑에서 잘려진 머리 모양이 꼭 저랬다.

여자는 쿡 웃음이 났다. 어깨가 우람한 걸로 봐서 빈센도르프의 비너스쯤 되는 체형으로 보인다. 여자의 입술 끝에 다시 웃음이 달린다.

여자는 다시 시계를 본다. 겨우 십 분이 지나 있다. 온탕에 들어앉은 여자는 조금 전의 자세 그대로다. 온탕의 솟구치던 물살도, 냉탕의 폭포수도 잠잠하다. 샤워꼭지도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조용하다.

오롯이 여자가 내는 소음만 공명이 되어 울린다. 집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여자는 다시 망설인다. 온탕의 여자는 석물(石物)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자는 탕에서 나오지 않는다.

물은 벌써 식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탕 안이 건조하고 추운 걸 보면 온탕 역시 뜨겁지 않은 게 분명하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진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단발머리의 넓은 등을 보며 여자는 석록(石綠)의 온탕에 발을 집어 넣는다. 물은 식기 직전의 위태한 온기를 지니고 있다.

몸을 부르르 떨며 몸을 낮췄다. 약간의 온기가 느껴지던 윗물과 달리 바닥은 미지근하다 못해 차갑다. 그러나 단발머리는 지긋이 눈까지 감고 있다. 이렇게 한기가 느껴지는 탕에서 말이다.

단발머리의 눈이 감긴 걸 보자, 여자는 대담해져 옆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몸피에 비해 어딘가 앳되어 보이는 인상이다. 희한하게 낯이 익다. 목욕탕을 거쳐간 여자 중 하나인지 모른다.

또 시작이다. 여자는 이런 경우가 잦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인 데도 낯이 익고, 처음 간 장소에서도 이미 와본 듯한 기시감, 어떤 땐 예전의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때도 있다.

그럴 땐 생이 내내 반복되는 건 아닌가, 여자는 무섭다. 전생에도 전전생에도 여자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섭도록 생생할 턱이 없었다. 몸이 떨리며 온몸의 털이 깃처럼 곤두선다.

물은 여자가 견디기엔 너무 차다. 여자의 몸이 한기로 새파랗게 변한다. 파랗게 질린 여자에 비해 단발머리의 몸은 유금(乳金)빛으로 태연하다. 물에 담긴 여자의 몸이 기이하게 굴절되어 보인다.

브라키오사우루스에 못지 않은 몸이다. 묘한 여자다. 싸늘하게 식은 물에서 어쩌면 저렇게 태연할까.

두꺼운 체내 지방으로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남극의 얼음 물고기처럼 빙점 아래서도 얼지 않는 부동액 같은 혈액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단발머리의 얼굴이 궁금하다. 옆으로 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잡히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탕 밖으로 나가며 슬쩍 얼굴을 볼 생각이다. 여자는 이미 싸늘해질 대로 싸늘해진 몸을 일으킨다.

단발머리 앞을 지나며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 순간, 단발머리가 반짝 눈을 뜬다. 움찔 놀란 여자가 황급히 눈길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시선은 다시 단발머리에게로 가 꽂힌다.

서서히 여자의 눈동자와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에선 아무 소리도 새나오지 않는다. 여자는 얼어붙은 듯 서 있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하고 떨어진다.

눈물방울이 흐르고 난 여자의 빈 동공(瞳孔)에 단발머리가 담겨 있다. 여자는 양면 거울을 바라보듯 오래 자신을 들여다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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