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건망증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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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뇌를 가진 생물 중에 물고기는 특히 기억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바로 옆의 동료 물고기가 입질한 미끼에 달려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도 꼭 같은 상황의 미끼를 다시 먹으려고 달려드는 습성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물론 낚시꾼에게는 이런 물고기의 건망증이 너무나 다행스러운 습성이겠지만, 물고기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 개혁의 실패 왜 반복되나

방금 친구가 달려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심해야지' 라는 다짐을 철석같이 했는데 그만 먹을 것을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덥석 물어 버리니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런 건망증이 비단 물고기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고 바로 우리 사회의 심각한 현실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개혁 과정에서 반복되는 건망증의 문제는 이제 시행착오의 수준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습성으로 자리잡은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국민의 정부' 가 들어선 이래 추진된 각종 개혁이 모두 엇비슷한 문제를 드러내며 좌초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이를 통해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꼭 같은 개혁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영역별로 나타난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경제부문과 관련해서는 초반에 문제가 됐던 대우자동차와 후반에 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가 거의 동일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의 방식 또한 거의 동일하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시장의 평가를 우선해야 한다' 는 기준과 '정치적 고려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는 기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문제해결의 타이밍을 놓치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직접적인 개입에서 벗어난 2000년 이후 경제정책의 기조 또한 '경기부양' 과 '구조조정' 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오락가락하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정치적으로는 공동정권의 이합집산에 국민은 신물이 나고 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그렇게 싸우던 민주당과 자민련이 대선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공동정권을 구성하겠다고 난데없는 선언을 한다.

어색하기만 한 공동정권을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던 두 당은 그러나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서로 원수가 돼 갈라섰다가 총선이 끝나자마자 또 합친다.

최근에는 대북정책을 핑계로 다시 갈라섰지만 이는 결국 다음 대선을 의식한 각 당의 지분확보 전략일 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정치개혁을 외친 지 만 4년이 다 돼 가는데 달라진 것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고 오직 국민을 우습게 아는 보스 중심의 정치만이 횡행할 뿐이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교육개혁.의료개혁.언론개혁은 모두 정부와 가까운 몇몇 시민단체가 설레발을 치며 바람을 잡은 후 정부는 국민이 원하니까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방식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하나 제대로 개선된 것 없이 혼란만 가중되고 있는 형국이다. 전문성 없는 인기영합주의가 개혁마다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민' '의료대란' '언론탄압' 이라는 평가가 이러한 사정을 잘 대변한다. 물론 이러한 혼란의 배후에는 '홍위병' 이라는 논란을 빚고 있는 시민단체의 관변화된 역할 또한 반복해 관찰되고 있다.

*** 권력 낚시꾼이 던진 미끼

기억력이 없는 물고기와 기억력을 가진 인간이 정말 다르다면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임기를 마무리해 가는 정권의 기억력이 물고기와 같은 상황에서 국민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국민마저 낚시꾼이 던진 미끼를 생각없이 받아먹는 물고기와 같은 모습이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낚싯줄에 걸린 미끼를 뇌가 없는 물고기가 다시 찾아 삼키듯이 우리 국민이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라는 다짐을 철석같이 하고도 또 다시 권력의 제물로 희생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권력의 낚싯꾼만 신바람날 일 아닌가.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柳錫春(연세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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