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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하오! 중국] 5. 남방으로 뻗어간 楚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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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황하 근처에서 살았던 중국인들이 용(龍)을 그려냈다면 장강 유역의 사람들은 봉(鳳)을 만들어냈다.

북방 사람들이 스스로를 황제(黃帝)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면, 남방 사람들은 자신들을 염제(炎帝)의 자손이라 여겼다.

혈연 중심의 사회구조를 더욱 확대시켜 효(孝)와 충(忠)의 개념을 제도화한 유가의 사상이 북방문화의 소산이라면, 개인의 자유와 초현세적인 관념을 발전시킨 도가(道家)는 남방문화의 소산이다.

황하와 장강의 문화는 이렇게 달랐다. 요즘의 남방문화는 상하이(上海)가 주도하고 있지만 춘추전국 시대 이래 중국 옛 문명의 발전사에서는 이른바 초(楚)문화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취재 기간 만났던 중국의 학자들 대부분은 "중국 남방 문화의 본류를 이해하려면 춘추전국 시대의 초나라 문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 고 충고했다.

초는 지금의 경계로 이해하자면 후베이(湖北).후난(湖南) 두 성이 주축이고 여기에 안후이(安徽).허난(河南)성 일부가 포함된다. 장강의 중.하류를 포괄하는 지역이다. 삼국시대의 유명한 전쟁터였던 형주(荊州)는 초나라 문화의 핵심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 문화를 이야기할 때 흔히 '형초(荊楚)' 문화라고 한다.

중국 중난(中南)민족학원 황창링(黃長凌)교수는 "초 문화의 핵심은 무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귀신을 숭상하며 다양한 종교사상을 발전시켰다. 초나라 고분에서 흔히 출토되는 봉황은 초나라 원주민들이 섬겼던 토템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중 초문화의 상징이 됐다. 웅혼한 기상에 근엄한 성격의 북방인에 비해 초나라 사람들은 낭만적인 경향을 보인다" 고 말했다.

유가와 함께 중국 사상사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도가는 초나라 사람들의 이처럼 낭만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문화의 토양 속에서 성장했다. 출생연대가 불확실하지만 노자(老子)는 지금의 허난성 사람이고 장자(莊子) 또한 같은 지역 출신으로 낭만과 자유라는 초나라 문화를 바탕으로 도가의 틀을 세웠다.

중국 4대 명절인 단오절(端午節)을 있게 한 애국시인 굴원(屈原)은 초나라 때 명신으로 회왕(懷王)의 실정을 간언하다 '이소(離騷)' 등 명시를 남기고 멱라강에서 빠져 죽은 사람이다. 그의 시는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깔고 나라에 대한 우국충정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일부 시에다 후대 사람들의 시를 덧붙여 만들어진 『초사(楚辭)』는 북방의 시가문학인 『시경(詩經)』과 더불어 중국의 남북문학을 대표한다.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세상에 아는 사람 많다지만 내 음악을 알아줄 이는 없다" 며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지음(知音)' 고사의 주인공 유백아(兪伯牙)도 초나라 사람이다.

이들이 만들어 낸 각종 역사적 유물도 눈여겨 볼 만하다. 초나라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봉황 외에 일반 청동기 등은 북방의 그것에 비해 동적이다. 북방의 유물 등에 많이 보이는 직선보다 곡선과 호선을 많이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유연성과 상상력에 활동성이 강조된 것들이고 정태(靜態)보다는 동태(動態)를 앞세운 모양새다.

사람의 성정(性情)으로 말하자면 초나라 사람들은 낭만적이며 자유방임적이다. 자고로 귀신을 숭배해 무속이 크게 발달한 점도 북방과 크게 구분지어지는 대목이다.

현세적 성공에 연연하기보다 탈속적인 가치를 우선시했으며 고정된 양식을 받아들이기보다 변형(變形)에 치중했다. 이러한 기질들은 정치적으로 전통적인 '반골' 들을 낳았다.

이들의 기질은 한 마디로 "부드럽게 나오면 받아주고 거세게 나오면 대든다(吃軟不吃硬)" 이다. 이처럼 낭만적이며 때론 충동적이고, 심지어는 '나도 황제가 될 수 있다' 는 생각으로 황권(皇權)마저 우습게 아는 이들의 기질은 이곳을 거듭되는 전란의 와중에 놓이게 만들기도 했다.

멀게는 당(唐)대 말기에 일었던 농민반란인 황소(黃巢)의 난을 비롯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등이 이곳에서 직접 발생하거나 여기서 싸움이 확대됐다. 가깝게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을 무너뜨린 우창기의(武昌起義)가 이곳에서 폭발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우창기의. 중국 속담에 '지식인(秀才)이 반란을 일으키면 3년 걸려도 성공 못한다' 는 말이 있지만 1911년에 우창에서 일어난 반란은 바로 성공을 거뒀다.

실제 막전막후에서 혁명을 이끌었던 쑨원(孫文)은 광둥(廣東) 사람으로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 우한(武漢)사람들은 "말만 앞섰던 쑨원 선생보다 행동이 앞섰던 후베이 사람들이 있었기에 혁명이 성공한 것" 이라고 자부한다.

혁명가적인 풍모에 시인의 기질을 함께 갖췄던 마오쩌둥(毛澤東)은 이 지역 사람의 기질을 가장 잘 말해주는 인물이다.

그는 후난성 출신이고 문화대혁명 당시 그에 의해 숙청됐던 류사오치(劉少奇), 한국전쟁에 참여했으며 나중에 毛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실각했던 펑더화이(彭德懷)등이 동향 출신이다.

개혁.개방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의 하나인 관료형 부패 척결을 공언하면서 "관(棺) 1백개를 준비하되 내 것도 마련하라" 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바 있던 중국 총리 주룽지(朱鎔基)도 같은 지역 사람이다.

후베이성이 낳은 사람으로는 역시 毛의 2인자 자리까지 올랐다가 모반을 꾀한 뒤 소련으로 망명하다 죽은 린뱌오(林彪), 반(反)군벌 투쟁에 앞장섰다 나중에 국가주석 자리에 오른 리셴녠(李先念), 왕조의 역사가 끝난 뒤 초대 민국 총리에 오른 리위안훙(黎元洪), 공산당 창당 멤버인 둥비우(董必武)등이 있다.

후베이.후난 사람들은 인근의 쓰촨(四川)성 사람들과 함께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 하지만 매운 것을 좋아하는 정도에서 차이가 있다. "쓰촨성 사람들은 매운 것을 두려워 하지 않지만 후난 사람들은 음식이 맵지 않을까 걱정한다" 고 한다. 끼니마다 붉은 고추를 곁들였다는 마오쩌둥의 음식습관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상상력과 낭만에서 나오는 예측불허성, 매운맛을 즐기는 성향에서 보이는 강인함은 옛 초나라, 즉 현재 후베이.후난성 사람들의 대표적 기질이다.

중난 민족대학원 黃교수는 "형(荊)과 초(楚), 이 지역문화를 나타내는 두 글자 모두 가시가 붙은 관목을 일컫는 말이다. 초나라 문화권 사람들은 형과 초로 뒤덮인 지역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중국 남방문화의 개척사를 대표하고 있다. 또 이를 통해 한족(漢族)이 광둥과 광시(廣西)등으로 영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초문화는 중국 남방문화의 모태" 라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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