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영화의 현주소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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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올해로 6회를 맞는 부산영화제(11월 9~17일)에서 주목할 일이 생겼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75.今村昌平)감독이 부산영화제의 PPP(Pusan Promotion Plan)에 선정된 것이다.

PPP는 주로 아시아 신인 감독들과 제작.투자.배급사를 연결해주는 자리. 여기에 든 감독은 신작을 만들 기회를 얻게 된다. '나라야마 부시코' '우나기' 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탄 이마무라 감독이 부산까지 노크한 사연은 무엇일까. 정태성 PPP 수석운영위원은 "일본에선 상업영화가 아니면 아무리 거장이라도 제작비를 모으기 어려운 실정" 이라며 "이마무라 감독도 이같은 고충을 토로한 적이 있다" 고 말했다.

김지석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일본에선 연 1백50편의 영화가 제작되지만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구분이 뚜렷해 작가주의 감독들이 설 자리가 없다" 며 "스타를 대거 기용하고 마케팅에 의존한 영화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 고 설명했다.

양쪽의 대치가 심각해 일본 영화계 전체의 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요즘 전대미문의 성장세를 이어가는 한국 영화계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근래 몇년 새 아시아 영화가 세계 영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달 초 폐막된 베니스 영화제에서 인도 감독 미라 네어의 '몬순 웨딩' 이 황금사자상을, 이란 감독 바박 파야미의 '비밀 투표' 가 감독상을 차지했듯이 칸.베를린.베니스 등 유수 영화제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유럽에선 아시아영화가 할리우드에 맞서는 대안으로 각광받는 모양새다. 부산영화제에도 아시아 영화계를 둘러보려는 유럽을 비롯한 외국 영화인의 발길이 해마다 늘고 있다.

과연 아시아영화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김지석씨는 "한 때 각국에 몰아친 금융위기로 거의 몰락 상태까지 갔던 아시아 영화산업이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고 있다" 며 "하지만 국가별로 편차가 심해 아시아 전체를 뭉뚱그려 판단하긴 어렵다" 고 말했다. 각국의 실정을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한국의 입장에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요즘의 한국처럼 가장 급신장세를 보이는 곳은 태국. 상반기 자국영화 관객 점유율이 20%까지 치솟았다. 40%를 웃도는 한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논지 니미부트르.용유스 통큰턴.타니턴 지트나쿨 등 신인감독들의 활약이 왕성하다. 올해 부산을 찾게 될 차트리찰레름 유콘 감독의 '수리요타이' 는 제작비 1백50억원의 대작.

역대 한국영화 중 가장 비싼 영화인 '무사' 의 두 배다. 17세기 미얀마의 침공으로부터 태국을 지켜낸 수리요타이 왕비의 일생을 그린 이 영화는 8월 중순 개봉해 지금도 예약이 3개월치나 밀려 있다고 한다. 올해 부산영화제는 태국영화의 현재를 다각적으로 살펴보는 특별전을 마련했다.

담 백한 영상과 진지한 주제로 무장한 이란영화도 순항 중이다. '비밀투표' 는 물론 칸영화제서 주목받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칸다하르' 도 부산을 방문한다. 이란영화의 특징은 아프가니스탄.쿠르드족 등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점.

'천국의 아이들' 로 친숙한 마지드 마지디의 '바란' (올 몬트리올 영화제 대상작)과 아볼파즐 잘릴리의 '델바란' 등이 그런 류에 속한다. 종교.국가의 강력한 통제 속에서도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이란표' 영화들은 영화의 사회적 역할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된다.

볼리우드로 불리는 인도영화의 기세도 여전하다. '몬순 웨딩' 을 비롯 현재 인도 최고의 제작비를 들여 촬영 중인 '타지마할' 까지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공존이 돋보인다. '몬순 웨딩' 은 부산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반면 대만과 홍콩은 기진맥진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허우샤오셴(侯孝賢).차이밍량(蔡明亮) 감독이, 베를린영화제엔 린정성(林正生) 감독이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등 돋보였으나 영화산업이라고 할 만한 토대는 황폐해진지 오래다.

1년 평균 제작편수는 15편 미만. 그것도 관객이 적어 1주일 이상 상영되는 작품은 찾기 힘들다. 주도권을 중국에 넘겨준 홍콩 영화도 희망이 사라진 상황. 왕자웨이(王家衛).프루트 챈 등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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