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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독서칼럼] 신경제 호시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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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1901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별세하고, 에드워드7세가 즉위했다.

빌리 하스는 이 해를 벨 에포크(bellepoque), 즉 세기말과 세기초 문화와 예술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난 '호시절' 의 출발로 잡았다.

한 세기가 지난 뒤 사람들은 다시 '호시절' 얘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예술이 아니라 경제가 - 지난 10년의 미국 경제가 - 주역이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것을 '신경제' 라고 부른다. 그것이 신경제인 까닭은 그 10년의 밀레니엄 호황을 새로운 차원의 기술이 주도했으며, 나아가 구경제의 특징인 경기 변동의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것은 열렬한 신경제 전도사들의 말씀이다.

*** 같은 현상 달리 바라보게

나는 이것이 턱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왜 턱이 없는지(?

)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열심히 생각해서 그냥 떠먹여주기를(!) 바란 것이다. 때마침 번역된 『신경제의 신화와 현실』(이후.2001)을 통해서 나는 이 게으르고 부끄러운 욕심을 덜게 되었다.

이 책의 저본(底本)은 미국의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 올해 4월호의 특집 논문 4편과 인터뷰다. 애초에 단행본을 위한 집필이 아니고, 잡지에의 기고여서 그런지 내용 조율과 필자 선정에 다소 틈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신경제라는 한가지 현상을 이렇게 달리 바라보도록 독자의 눈을 열어주고 있다는 데는 한 점 이의가 없다.

먼저 신경제 호황을 유도했다는 정보기술(IT)의 충격은 정녕 그 규모와 효과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인가?

이 책의 대답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증기기관이나 자동차의 출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전화의 발명보다도 당대의 경제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작았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 내의 컴퓨터가 생산성 증대와 관련이 적은 부문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1년 미국 기업 컴퓨터의 76.6%가 상업과, 금융.보험.부동산(FIRE)과, 법률.보건.금융서비스 부문에서 사용되었다.

한 연구 보고에 따르면 90년대 후반의 연평균 생산성 증가율 1.33% 가운데 오직 0.07%만이 컴퓨터 활용의 성과로 나타났다.

그 신도들의 기대와 달리 '디지털 혁명' 은 구경제를 혁명적으로 바꾸지 못했으며, 정보화 시대는 '기술 순환' 이 경기 순환을 대신한다는 설교 역시 과장이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전자 통신 산업에의 과잉 투자가 오늘의 반도체 불황 같은 '블랙홀' 을 만들지 않았는가?

그리고 신경제는 불황을 퇴치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 초유로 경기 변동의 폭력성을 제거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지난 호황의 내용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계속될지를 살펴야 한다. 디지털 경제는 분명히 적시(just-in-time) 생산.적정 재고.물류 개선을 통해 기업의 비용을 절감했다.

반면에 유연성 제고의 명분으로 고용.임금.복지.환경에 전방위 공세를 펼침으로써 근로자의 삶을 전에 없이 불안하고 피폐하게 만들었다. 미국 실리콘 밸리의 노숙자 가운데 40%가 직장을 갖고 있다면 누가 곧이듣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높은 생산성이 자동적으로 높은 경제 성장을 가져온다는 상식적인 가정은 그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 (25쪽)이라는 관찰은 참으로 옳다. 생산성 과실이 고루 분배되지 않을 때 지속적인 성장은 기대할 수 없으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불균등 발전을 끈질기게 강요하고 있다.

어제의 호황이 내일도 이어질 것인지의 여부는 경제학자보다 점술가에게 묻는 편이 낫다. 여기 경제학자의 몫은 기껏해야 어제의 호황을 떠받친 요소들이 내일도 계속 받쳐주겠느냐는 질문 정도인데, 이 대답조차 자신이 없다.

앨런 그린스펀이 '비합리적 열광' 이라고 부른 증시 호황이 있었다. 주가 상승의 기대로 부푼 의제(擬制) 소득은 먼저 소비를 부추기지만, 주가에 거품이 빠지면 그것은 즉시 부채로 변한다. 신경제 호황은 이렇게 미래 채무에 의지한 현재 소비의 산물이었다.

'기업이 무차별적으로 불필요한 컴퓨터를 구입하고… 저축은 갑자기 내리막길을 달리고, 미국은 너무 많은 돈을 해외에서 차입했지만 불황이 이 모두를 해결할 것이라는' (45쪽)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필요한 불황' 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할는지 모른다. 세기말의 동남아 경제를 초토로 만든 초국적 금융 투기도 있었다.

그 작전 뒤 미국으로 들어와 증시를 받쳐준 엄청난 외자가 다시 빠져나갈 때, 미국 경제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 미국 구제할 통화기구는

지난해부터 신경제 행진에 기세가 꺾이고, 드디어 올 2분기 성장률이 8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으로 미국 유수의 언론과 연구소들이 예측하고 있다. 지난주 국제통화기금은 미국의 경상 적자 확대가 초래할 달러 가치 급락을 경고하고 나섰다. 세상에 미국을 구제할 국제 통화기구가 어디 있는가?

신경제가 거덜나서 신날 일도 없고, 호시절이 끝나서 득될 것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20여 년의 정치 생활에서 가장 우울한 양상의 하나는 많은 좌파가 절대적 무력감에 빠졌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그 패배주의가 역전되는 듯합니다' (1백35쪽)라는 '신정치' 대망(待望)의 '위로' 조차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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