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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부시와 반(反)노무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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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늘날 미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조지 W 부시라고 확신하는 미국인들이 있다. 영화 감독 마이클 무어나 억만장자 조지 소로스가 그런 부류다. 그들은 자기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 가며 부시의 낙선에 온 정열을 쏟았다. 하지만 오케이 목장의 결투는 부시의 승리로 끝났다. 간발의 차이일 줄 알았는데 부시의 총이 확실히 빨랐다.

존 케리에게 표를 준 48%의 미국 유권자들 모두가 무어나 소로스의 심정으로 투표장에 간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4년 전처럼 36일씩 끌지 않고 하룻밤만에 승패가 판가름난 것 말고는 별로 기뻐할 게 없다는 것이 그들의 대체적 인식이다.'예수의 땅''천치들의 땅'을 떠나 캐나다나 뉴질랜드행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다는 보도도 있다.

선거 당일 실시된 출구조사 결과 표심(票心)에 영향을 미친 이슈 중 도덕적 가치(21%)가 예상을 깨고 경제(20%)나 테러(18%), 이라크(15%) 등보다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도덕적 가치를 가장 큰 이슈로 꼽은 사람의 표는 78대19의 압도적 차이로 부시 쪽으로 쏠렸다. 그래서 도덕적 가치관의 차이가 빨강(공화당)과 파랑(민주당)으로 아메리카의 정치색을 확연히 갈라놓은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부시 진영이 동성(同性)간 결혼이나 낙태, 배아 복제 등 윤리적 이슈를 교묘하게 쟁점화함으로써 복음주의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보수 진영의 표를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민주당 쪽 패인 분석이다. 도덕적 가치 논란을 떠나 이번 선거는 '우리'와 '그들'로 짝 갈라진 두 개의 미국을 통합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임을 미국인들에게 다시 일깨워줬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의 나라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다 돼가지만 우리 사회의 분열의 골은 갈수록 깊어만 가고 있다. 책임 있는 공당의 대변인이 해외순방 길에 오르는 대통령을 향해 "(국내에 없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하니) 가급적 오래오래 머물다 오시라"고 공개적으로 야유를 보낼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흔치 않다. 정상(正常)이 아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표현의 자유에 실어 날린 언어의 비수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목을 향해 다시 날아올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의 근원이 그에게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내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경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경제 현상의 본질은 외면한 채 그의 오기만 아니면 경제가 살아날 것처럼 얘기한다. 전후좌우를 따지지 않는다. 코드와 편 가르기를 말하지만 이 또한 그만의 문제는 아니다.

절차적 정당성에 기초한 권위는 존중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는 심각한 분열 속에서도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공통 기반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탈선해도 벌써 탈선했고, 내분으로 나라가 쪼개져도 여러 번 쪼개졌을 것이다.

친노(親盧)가 딛고 선 땅은 금성이고, 반노(反盧)가 딛고 선 땅은 화성이다. 공통 기반이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은 있을 수 없다. 남은 3년 동안 노 대통령이 권력의 유혹에 스스로 굴하지 않고, 무권위의 참담함 속에서도 탈권위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시대가 부여한 소임을 다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배명복 순회 특파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