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현대건설 살리기' 에 公기업 동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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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가 부도.퇴출위기에 몰린 민간기업을 지원하라는 공문을 공기업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현대건설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해석이다.

정부가 논란의 소지가 큰 민감한 사안에 대해 공문까지 써준 속사정은 비록 공기업이라 할지라도 무작정 민간부실을 떠안을 수 없다는 공기업 쪽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 현대건설 어떻게 구제해 줬나=현대건설은 지난해 자금난을 견디다 못해 10월 30일 1차 부도를 냈고, 11월 3일에는 채권단으로부터 퇴출 대신 '조건부 회생' 판정을 받는 등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정부도 현대를 살리기 위해서는 공기업을 동원해서라도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급한 상황에 몰렸다.

그러나 현대 지원에 앞장세운 한국토지공사는 정부와 현대의 요구대로 서산농지를 위탁매매할 경우에 손해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폈다. 현대측이 이 땅의 가격을 최소한 조성비(6천4백70억원)수준엔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토지공사측은 주변 땅값을 고려할 때 현대측의 주장은 턱없이 비싸다며 공시지가의 75%인 2천7백15억원으로 산정했다. 이 땅을 현대가 제시한 값에 모두 팔기에는 버겁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토지공사는 지난해 11월 13일 열린 이사회에서도 이 가격이 비싸다고 판단, 현대와 재협상을 통해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아예 계약이 무산될 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자 재정경제부는 다음날인 14일 서둘러 경제간담회 회의 결과라는 문서를 통보한 뒤 현대건설과 계약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게 토지공사측의 설명이다. 토지공사 이사회는 결국 현대 지원을 거부한 하루 뒤인 이날 밤 늦게 서둘러 이사들이 위임한 서면결의를 통해 현대를 지원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대신 정부는 토지공사와 농업기반공사가 이행과정에서 손실이 없도록 하는 내용을 문서에 별도로 작성해줘 토지공사측을 설득했다는 게 관련자들의 설명이다.

◇ 안 팔리는 서산땅 골치=지난해 말 토지공사가 매각대행 계약을 한 서산간척지는 현재 제대로 팔리지 않아 문제가 더 커지고 있다. 또 이 공문에는 토지공사와 농업기반공사에 손실이 없도록 보증해주면서도 구체적인 보전내용은 명기하지 않아 향후 책임 논란도 불가피하다.

서산간척지는 7월 말 현재 총 3천82만평 중 대부분인 2천35만평(66%)이 팔리지 않았다. 따라서 농업기반공사는 문서대로 계약 만료시점인 오는 11월까지 팔지 못하는 잔여토지를 매입해야 한다.

또 토지공사도 선지급금으로 준 3천4백50억원 중 현재 약 9백억원만 회수한 상태라 수천억원대에 이를 손실분에 대한 정부의 보전문제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농업기반공사 관계자는 "현재의 재무상태로 볼 때 잔여토지를 매입할 돈도 없거니와 당시 농림부가 결정한 일이라 우리는 입장을 표명할 처지가 못된다" 고 말했다.

농림부도 토지공사의 매매 위탁기간이 끝나는 오는 11월께 관련 장관들이 다시 회의를 열어 매입 여부와 후속 대책 등을 논의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농림부 관계자는 "정부가 당시 현대를 지원하는 방침이라 정책적으로 따른 것뿐" 이라며 "농업기반공사의 경우도 자체 여유자금이 없는 처지라 이 땅을 인수해야 한다면 어차피 정부가 지원해야 할 판" 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부가 설령 이를 농업기반공사에 매입하게 한다 해도 김포매립지 사례처럼 공시지가의 66% 값으로 사야 하는데 현대건설이 이런 헐값에 내놓을지도 의문" 이라고 덧붙였다.

한 관계자는 "공문대로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오는 11월 13일까지 서산 땅을 다 팔지 못해 토지공사.농업기반공사가 손실을 보면 정부가 출자를 통해 보전해주는 방법을 쓸 것으로 알고 있다" 고 말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최고위층간 어떤 얘기가 오간지는 몰라도 지난해 토지공사측에 서산농장 위탁매매를 요청해 이뤄진 계약사항일 뿐" 이라며 정부 개입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또 "토지공사의 위탁매매기간 만료시점인 오는 11월 잔여토지를 농업기반공사에서 매입한다는 얘기도 전혀 들은 바 없다" 며 "아무리 정부라 해도 소유자인 현대건설과 협의 없이 마음대로 헐값에 이를 팔도록 강요할 수 없다" 고 말했다.

◇ 석연찮은 경제장관 간담회=정부가 토지공사 등에 현대 지원을 촉구한 근거가 된 경제장관 간담회가 열리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문서대로라면 이 간담회에 당연히 참석해야 할 관련 경제부처 장관들이 이날 오전 국무회의에 참석한 것 외에는 어떤 형태의 간담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림부장관의 한 측근은 "한갑수 장관은 당일 어떤 경제장관 간담회에도 참석한 사실이 없다" 고 해명했다. 또 건설교통부 관계자도 "지난해 당시 김윤기 전 장관은 오전 국무회의 외에 간담회 같은 행사에 참석한 일이 없다" 고 말했다.

김시래.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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