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2% 부족한 한국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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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4·19 혁명으로 탄생된 민주적 헌법과 정부는 이듬해 군사쿠데타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 1970년대 후반에는 4·19 당시의 독재보다도 더 억압적인 유신체제가 자리 잡기도 했다. 그래도 4·19 민주이념은 죽지 않고 이어져 87년 6월 항쟁을 거쳐 마침내 민주화를 실현했다. 민주주의의 현 좌표와 과제를 진지하게 헤아려 보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시민의 책무다.

독재 시기의 한국에 대한 기사를 쓴 외국 기자는 한국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는’것에 빗대어 표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코노미스트(Economist)’지 연구팀은 2008년 9월 기준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167개 국가 중 28위로 평가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물론 선진민주국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한국 시민들은 지금의 민주주의 수준에 안주할 수는 없다.

과거보다 크게 나아진 선거과정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4·19 혁명을 촉발시킨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 권위주의 독재 시기의 선거를 상기하면 대선·총선·지방선거가 상당히 자유롭고 공정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선거에서 정책경쟁은 아직도 미흡하다. 부패 소지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최근 현직 군수가 정당공천 대가로 지역구의원에게 뇌물 제공을 기도하다 체포된 일이 있다.

시민참여의 질을 높여야 한다. 18대 총선 투표율은 50%에도 미치지 못해 참여위기의 징후를 드러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가 시민의 적극적 관심과 참여를 진작하기 어려울 듯하다. 일상적 생활문제가 쟁점이 되어야 할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의 정쟁에 온통 매몰될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이용과 시민의 직접행동도 공공문제에 대한 토론을 활성화할 수 있다. 문제는 건강한 시민참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공공이익을 저버리지 말고 법과 질서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우정치’‘민주주의 과잉’과 같은 비난이 일기 마련이다.

공공질서를 고려하는 균형적 관점에서 시민의 자유를 지속적으로 신장시켜야 한다. 유신체제나 ‘신군부’ 지배체제 시기에 국가권력은 매우 강압적이었다. 국제 비정부기구(NGO)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에 따르면 한국 시민들은 이제 그 척도에 비추어 가장 높은 수준의 참정권과 두 번째 높은 수준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향유한다. 그렇지만 집회와 시위에 대한 경찰 당국의 대응, 인터넷 표현의 자유, 일부 언론매체와 정부의 마찰, 국가보안법, 노조의 조직과 활동, 여성과 소수자 차별 등의 사안들에 있어 개선의 노력을 신중하고 끊임없이 경주해야 한다.

입법·행정·사법 기관을 포함한 광의의 정부가 보다 효과적으로 기능을 수행하고 투명성을 더욱 높여 일반시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다지기 위한 헌법 개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치인들의 기존 정치 스타일이 바뀌어야 한국 정치가 양질의 민주주의로 격상될 것이다. 네덜란드나 스위스에서의 상생적 ‘협의제(consociationalism)’ 민주정치는 사회경제적 또는 문화적 균열이 깊은 시민사회의 토양에서 정치주역들이 호양(互讓)의 정신으로 일구어낸 것이다. 정치인들이 ‘입법전쟁’을 불사하고 당리당략적 이합집산을 일삼게 되면 선진민주정치는 요원한 목표로 남게 된다.

민주화 이후 23년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공개경쟁과 시민참여 및 시민의 자유와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절차로서의 민주주의가 아직 공고화되지 못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더욱 굳게 다져야 한다. 아울러 경제 형평성, 사회 정의, 복지 등 시민들이 사회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실질적 의미의 민주주의도 병행 발전시켜야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전제하지 않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앞세우면 독재 용인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도외시하면 시민의 동등한 권리 보장이 어렵게 되고 대중영합적인 정치가 등장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4·19 혁명 이래 부단한 투쟁과 운동을 통해 창출된 공공재다. 한국의 시민이라면 4월에는 이 소중한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고 전진하는 도상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를 곰곰이 따져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박찬욱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