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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대한민국 잃어버린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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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4월로 접어든 지 열흘이 넘도록 서울 여의도 윤중로의 벚나무들은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했다. 14일 서울의 최저 기온은 1.2도. 4월 중순 기온이 이렇게 낮은 것은 23년 만에 처음이다. 대한민국의 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구희령·송지혜·최모란·유길용 기자


들려주지 못한 봄의 합창

#1. 진해여고 합창반 이윤정양

진해여고 2학년 이윤정(17)양은 올봄을 몹시 기다렸다. 지난해 진해 군항제 기간 중 이양을 비롯한 진해여고 합창반은 군악의장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로터리에 설치된 커다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자 수많은 관중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뿌듯했다. 올봄, 이양은 2학년이 됐다. 합창반 반장으로 뽑혔다. 곧 다가올 군항제 합창 무대. 두근거렸다. 이번엔 더 특별한 곡이었다. 비제·바그너·베르디 등이 작곡한 ‘개선행진곡’ ‘사냥꾼의 합창’ 등 오페라 아리아를 이탈리아어로 부르기로 했다. 어려웠다. 악보만 24쪽이었다.

합창반원 45명은 매일같이 오후 9시까지 두 시간씩 연습했다. 토요일은 오전 10시부터 다섯 시간씩 노래했다. 집에서는 인터넷으로 오페라 아리아를 몇 번이고 들었다. 학교 친구들에게도 자랑했다. 부모님도 보러 오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천안함이 침몰했다. 페스티벌은 취소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우리는 해군 도시의 시민이니까요. 숨진 장병들을 생각하면 저도 안타깝고 눈물이 나요.”

이양은 아직도 두꺼운 오페라 악보를 가지고 다닌다. “너무 연습을 많이 해서 아쉬워서요…. 한 번도 못 보여준 공연이니까. 아쉬워서….”


열매 맺지 못한 매화나무

#2. 경남 김해 과수원 진정도씨

“꽃이 피기는 폈지. 그런데 눈이 오더라고. 꽃이 얼어버렸지. 그냥 얼어버렸지.”

진정도(56)씨는 경남 김해시 한림면에 있는 1만3000㎡ 규모의 과수원 주인이다. 30년 동안 과일 농사를 지었다. 복숭아·매실·단감 등이 주종이다. 복숭아와 매실은 3월 말에서 4월 초에 꽃이 피었다가 진다. 그리고 열매가 열린다. 6~7월이면 수확을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복사꽃도 매화도 피었다. 그러나 얼어버렸다. 이상 한파와 때아닌 봄눈 때문이었다.

“수정이 안 되고 ‘무정’이 되어 버린 거라. 4월 1일, 2일, 3일. 무정이 우수수 생겨 버렸다고.”

핀 꽃의 3분의 1이 무정이었다. 얼어버린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올해는 유난히 무정이 많이 생겨서…. 보통 때는 웬만한 꽃 진 자리에 다 열매가 열리는데…. 마음이 많이 아팠지. 농사라는 게 자식 키우는 것 하고 똑같은 건데, 꼭 자식 아픈 것 같지.”

진씨는 “안 그래도 요즘은 외국산 때문에 과일 값도 잘 못 받는데…. 비하고 눈이 많이 와 일조량이 적었기 때문에 당도도 떨어질 것 같다”며 걱정했다. 진씨는 “ 그래도 수박 농사짓는 내 친구보다는 낫다는구먼” 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육비리에 시든 호접란

#3. 양재 화훼단지 이동범씨

14일 오후 5시. 서울 양재동 화훼단지 안 꽃가게 ‘동성농원’은 조용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전화벨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이동범(61)씨는 “단골 거래처만 800개가 넘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씨가 ‘꽃일’을 한 지도 42년이다. 1968년 서울 서초동이 벌판일 때 꽃 농사를 시작했다. 91년 화훼단지가 생기면서 판매상으로 변신했다.

“반평생 넘도록 꽃에 파묻혀 살다 보니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곤 했는데 지난해부터 주름살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어요(웃음).”

금융위기 이후부터였다. 꽃이 잘 팔리지 않았다. 이씨는 “먹고사는 데 꽃은 필요 없으니까 경기를 많이 탄다”고 했다.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대규모 교원 인사가 있기 때문이다. ‘난초 특수’를 노렸다. 승진 축하 선물로 인기가 높은 호접란을 잔뜩 들였다. 흰색·노란색·자주색 꽃잎이 나비 날개처럼 화사한 서양란이다. 그런데 대규모 교원 인사 대신 대형 교육 비리가 터졌다. 공정택 전 서울시 교육감까지 연루된 비리였다. 난초는 예년의 10분의 1도 팔리지 않았다. 가격도 30% 이상 떨어졌다. 이씨의 가게에는 알록달록한 호접란들이 가득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치예요. 호접란은 일 년에 딱 한 번 꽃이 피는데…. 지금 못 팔면 안 되는데….”


대목 잃은 호두과자 노점

#4. 여의도 윤중로 나현호씨

13일 오후 6시. 서울 여의도 윤중로 벚꽃 아래에서 나현호(54)씨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기서 호두과자 장사한 지 10년째인데 이렇게 안 팔리기는 처음이오.”

나씨는 벚꽃이 피기만을 기다려왔다. 매년 4월 여의도 벚꽃축제는 호도과자 노점상들의 ‘노다지’였다.

“하루 50만~60만원씩은 예사지. 100만원씩 팔 때도 있고. 100만원어치면 500봉지라고요. 그렇게 팔고 나면 장사가 끝나는 거지요.”

나씨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호두과자 노점상들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9월부터 이듬해 벚꽃축제까지 장사를 한다. 이후 의류나 신발 노점으로 전환한다. 호두과자 장사는 벚꽃축제가 정점이자 피날레다.

올봄 나씨는 ‘대목’을 애타게 기다렸다. 쌀쌀한 날씨 탓에 벚꽃이 오래도록 망울을 맺지 않았다. 기다렸다. 그러나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축제가 축소·연기됐다. “축제가 취소되는 것이 맞죠. 나라에서 정한 일이고, 희생된 군인들 사연도 안타깝고…. 그게 맞긴 맞는데….”

나씨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이날 하루 10봉지를 팔았다. 그나마 5봉지는 기자가 사준 것이었다.


# 에필로그 더디지만 그래도 꽃은 피고 …

“너무 가라앉아서 기분전환” 주말 여의도 벚꽃인파 몰려

‘천안함 순국 용사들이여!/조국은 그대들을/영원히/기억하리라.’

18일 오후 국회의사당 본청 건물에는 천안함 순국 장병들을 기리는 커다란 걸개가 걸려 있었다. 하늘은 흐렸고 바람은 찼다. 본청 앞 잔디밭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 잔디밭 위를 뛰어다니는 초등학생, 느릿느릿한 걸음의 어르신들이 보였다. 걸개에 눈길을 두고 짧은 묵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벚꽃 구경을 나온 김승욱(46)씨는 “나라 분위기도 그렇고 마음이 착 가라앉아서 기분 전환을 하려고 나왔다”며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착잡하다”고 말했다. 

이날 낮 12시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 호두과자를 파는 나현호씨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10여 분 동안 10봉지가 팔렸다.

“이제야 봄이 오는 걸까요. 다음 주말까지 조금 더 힘을 내 보렵니다.” 나씨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19일부터 다시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온다는 소식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봄은 언제쯤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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