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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희생 당한 인간..존재의 한없는 가벼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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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호 05면

희곡 ‘오장군의 발톱’은 원로 극작가 박조열(80)의 대표작 중 하나다. 함경도 함주에서 태어난 박씨는 열아홉이던 1949년 공산주의의 폭정을 피해 월남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나자 자원 입대해 육군에서 12년을 보냈다.

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 연극'오장군의 발톱'

1974년에 나온 ‘오장군의 발톱’은 참전 용사인 그가 설악산 전선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당시 그의 곁에 있던 전우들은 대부분 헐벗고 가난했으며,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농민 출신이었다고 한다. 변변한 사격술도 익히지 못하고 부랴부랴 전장에 차출된 청춘들이었다. 주인공 ‘오장군’은 바로 그런 인물들의 전형이다. 옛날 여느 부모가 그랬듯이 장군의 어머니도 씩씩하고 건강하길 바라며 아들에게 ‘장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산골마을 가난한 소작인 아들인 오장군은 한 식구 같은 ‘먹쇠’와 감자밭을 일구며 홀어머니와 함께 평화롭게 산다. 어느 날 그에게 ‘동쪽나라’의 징집영장(사실은 같은 마을 동명이인의 징집영장이 잘못 전달된 것이다)이 날아든다. 입대 전날 그는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아이를 만들자는 꽃분이의 제안을 따라 결혼을 한다.

졸지에 군에 간 이등병 오장군은 나중에 전사자를 구분하는 징표로 발톱을 깎아 엄마에게 보낸다. 어느 날 ‘고문관’ 사고뭉치인 그에게 역정보 공작원이라는 임무가 떨어진다. 그가 속한 ‘동쪽나라’가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오장군을 ‘서쪽나라’에 거짓 정보를 발설하는 총알받이로 쓰기로 한 것이다. 서쪽나라에 붙잡혀 거짓 정보를 털어놓는 오장군은 결국 영문도 모른 채 총살을 당한다.

이 희곡이 막상 연극으로 무대에 오르는 데는 14년이 걸렸다. 군대 이야기를 공론화하기 어려웠던 1970년대 금서에 묶였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 정부로서는 리얼리티 이면에 숨어 있는 알레고리의 ‘독소’를 수용하기 어려웠을 게다. 1988년 올림픽 이후 한국이 문명세계로 진입하면서 이 작품도 겨우 빛을 보았다.

이번 무대는 명동예술극장이 기획한 ‘한국 현대연극 풍경’ 연작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었다. 35년 전 극단 자유극장이 같은 무대에 올리려고 했으나 당시 폭압적인 시대 분위기에 걸려 개막 전 공연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때 진 빚을 이번에 갚은 셈이다.
최근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이성열이 연출한 ‘오장군’은 사실적인 이야기의 바탕 위에 동화적인 팬터지를 가미한 ‘서사적 동화’ 형식에 충실했다.

고향의 감자밭과 일선의 전쟁터, 동쪽나라와 서쪽나라 등의 뚜렷한 대비를 통해 그런 효과는 더욱 빛났다. 일러스트를 연상시키는 민화풍 무대 디자인의 과장법은 다소 당혹스러웠지만, 자연 친화적인 농촌 사회와 냉혹한 현대사회의 극명한 대조를 꾀하려 한 의도는 자못 신선했다. 빼어난 서정성과 해학, 적절한 템포감으로 지루한 느낌은 없었다.

일별하면 ‘오장군’은 조직의 생리에 적응하지 못한 ‘25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애사였다. 한데 그 울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거부할 수 없는 조직의 힘과 소통 부재, 그로 인한 ‘착한 희생’은 아직도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의 여운은 매우 낙관적이었다. 꽃분이의 불러오른 배 안에 ‘희망의 씨’가 자라고 있음이 그 증거일 터이다.

순박한 시골 어머니 역을 맡은 넉넉한 품의 고수희와 천연기념물 같은 어수룩한 오장군 역 김주완의 연기는 이 연극의 적잖은 허물을 덮는 열연이었다. 이호재와 권병길 등 중진 배우들이 토막웃음을 주는 단역을 마다하지 않은 점도 기꺼이 칭찬할 만하다.

징병제 나라에서 군대의 이야기는 가족과 형제가 연계된 ‘우리 모두의 것’이기 일쑤다. 가끔 무시무시한 그 냉혹한 현실에 노출될 때 우리는 전율하곤 하는데, 그런 우리의 자화상을 우화로 재현한 ‘오장군의 발톱’은 시공을 초월해 여전히 유효한 고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5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기획운영부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공연예술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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