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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장원 먹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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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배 남대문 상인 일어짱 경연대회'는 의류상 이영수(41)씨와 홍삼을 파는 윤병문(32)씨가 50점 만점에 42점을 얻어 공동 1등을 차지했다. 비록 트로피나 상금은 없지만 유학.연수 한번 없이 외국어를 정복한 그들에겐 값진 기념이었을 터다. 두 사람에게서 우승 소감과 '좌충우돌 일어 정복기'를 들어봤다.

'패션사' 대표 겸 디자이너 이영수씨
일본 사투리로 농담도 하죠

"처음엔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도 제대로 못했죠. '모시모시(여보세요), 야스이(싸요)' 수준이었어요."

남대문 시장에서 15년째 가죽 옷 전문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씨. 그에겐 10년지기 일본인 단골이 많다. 아니, 단골이라기보다 친구.애인이다. 물건은 안 사고 "남자 친구와 헤어지려는데 한국에선 어떻게 하느냐"는 등 인생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 청산유수 같은 그의 일본어 실력 때문이다. 가끔 일본인 점원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는 말할 줄만 알지 쓸 줄은 모른다. 장사하면서 익힌 '시장통 일본어'인 때문이다.

그는 일본어 문자인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도 모른 채 일본인 고객을 상대했다. 웃음 띤 얼굴로 '이찌(하나),니(둘)'하며 계산기에 값을 표시해 물건을 팔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얼마나 좋은 가죽인지, 값은 싼지 제대로 설명할 수없었다. 가게 앞 노점상 할머니를 찾아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본어 발음이 우리 말로 표시된 교재를 사 종이가 해질 때까지 반복해 읽었다. 매일 한 주제씩 정했다. 술 약속이 있는 날이면 '술=사케''과일=구다모노' '부침개=지지미'하는 식으로 외워 술자리에서 직접 익혔다. 이렇게 익힌 어휘는 가게를 찾은 일본인을 상대로 써먹었다. 전혀 관계없는 상황인데도 그 단어를 넣어 말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8도 일본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사투리도 제법 가려내 적절히 대처한다는 것이다. 북쪽 지방 출신인 것 같으면 '유키쿠니(雪國)'를 들먹이며 '후유노 소나타(겨울연가)'를 이야기하는 식이다.

이씨는 "결국 언어도 사람들 사이의 일이므로 틀리지 않겠다는 강박관념보다 잘 웃고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게 중요하다"고 귀띔했다.

대성물산 공동대표 윤병문씨
도쿄 유학파들 겁 안나요

“에이,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우승했다는 소식에 사뭇 겸손해 하면서도 스스로 자기 만한 노력파도 없을 거라고 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 “장사나 하라”는 친척의 권유로 남대문 시장에 들어온 그다. 노력하는 만큼 매상이 오르는 재미를 느낄 무렵, 의사소통의 벽에 부닥쳤다. 바로 일본인 고객들이다. 그나마 ‘콩글리시’로 얘기하다 보면 고객들은 대충 듣는 시늉을 하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관광 가이드로부터 “‘진셍(인삼)’ 파는 사람이 ‘니혼고(일본어)’도 못하느냐”는 면박까지 들었다.

오기가 생겨 곧바로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다. 저녁 7시, 일이 끝나면 곧장 종로의 학원에 가 수업을 들었다.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아 같은 수업을 두 시간 연속으로 등록했다. “머리로 안 되면 몸으로 배우자”는 각오였다.

집에 와선 일본 만화영화를 보며 받아쓰기를 했다. 재미도 있고 공부도 되니 일거양득이다. 처음엔 10%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1년쯤 지나니 70%정도 받아적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말문도 트였다. 그는 ‘극존칭 일본어’를 겨냥했다. “젊은 손님에게도 최대한 존칭을 붙여 존댓말을 건넸더니 처음엔 어리둥절해 하거나 픽 웃더라고요.” 하지만 일본인 손님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지난해 그동안 모은 돈을 털어 공동 투자로 가게를 낸 윤씨 앞에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 일본 현지 유학파들이 남대문 시장에 대거 진입한 것이다.

”그래도 ‘된장 일본어’가 단무지 먹고 배운 일본어보다 더욱 구수하지 않겠어요?“ 그가 익힌 토종 외국어가 원산지 외국어를 거뜬히 이겨내길 내심 기대해 본다.

6개 국어 척척 택시기사 윤월로씨
3년 미치니 잠꼬대도 영어로

무심코 올라탄 택시.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트로트 가요 대신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 회화 테이프가 돌아간다. 운전석 옆 쪽에는 '포켓 러시아어','스페인어 회화'같은 책이 잔뜩 꽂혀 있다. 정지 신호에 멈출 때마다 운전기사의 눈은 기어 앞에 놓아둔 책으로 향한다. 곁눈질해 보니 일본어와 영어가 빼곡히 쓰인 단어장이다. 이쯤 되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쩍 운전을 방해하게 되게 마련.

"아저씨, 도대체 몇 개 국어를 하시는 거예요?"

택시기사 경력 34년째인 윤월로(58)씨. 그는 영어.스페인어.프랑스어.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 등 6개 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한다.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뒤 40대 중반부터 시작해 모두 독학으로 배웠다.

처음 외국어에 눈을 돌린 것은 15년 전, 어깨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으로 운전을 잠시 쉬어야 할 때였다. 생계 걱정 속에서도 한편으론 "하늘이 준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접었던 영어공부에 도전할 기회였다.

"길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외국인을 보고도 말이 안 통할 거란 생각에 그냥 지나쳤어요. 내 차를 타는 손님에게 따뜻하게 인사말을 건네지도 못한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죠."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영어회화 책을 폈다. 그러나 기억나는 건 알파벳 정도. 학원에도 등록해 봤지만 대학생 위주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이 나이에 무리한 욕심인가' 절망도 했지만,'지금 아니면 평생 못한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었다.

서점에서 영어회화 테이프와 교재를 사 하루종일 되풀이해 들었다. 테이프가 열을 받아 뜨거워지면 꺼내 식히기를 반복했다. 탑승한 외국인 손님은 즉석 회화강사가 된다. '굿 애프터눈(낮 인사)'에 이어 '웨어…(어디로)'만 하면 원산지 생생 영어가 되돌아 온다. 물론 알아듣기 힘들다. 하지만 "왓?(뭐요)""파든, 써(죄송합니다만)"는 훌륭한 '다시 듣기' 모드. 결국 하루에 근무하는 15시간과 퇴근 후 2~3시간을 모두 영어 공부에 투자한 셈이다.

"3년을 했더니 영어로 잠꼬대가 되더군요. 자신감이 붙으면서 일부러 외국인 손님을 태우러 이태원이나 용산 근처로 차를 몰았어요." 신촌 기차역에서 내려 문산행 기차를 타려던 미국인 손님이 문씨와 대화하는 재미에 문산까지 함께 가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동료 기사들을 대상으로 무료 영어강좌를 시작했다. "운전에 필요한 영어만 쏙쏙 들어오게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서울 개인택시조합의 명예 영어강사로 초빙됐다. 인천공항공사의 요청으로 공항출입 택시기사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기도 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유럽 손님들이 탔을 때 한두 마디 자국어 인사말이라도 건네면 얼마나 반가워할까 싶어 8년 전 시작했다. 2년 전부터는 러시아어.일어.중국어도 공부한다.

그는 "나이와 공부는 별개"라며 "앞으로 아랍어까지 익혀 유엔 공용어는 모두 할 줄 아는 '글로벌 택시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신은진 기자<nadie@joongang.co.kr>

용산경찰서 영어왕 이동혁 순경
해외연수요? 여권도 없어요

"Sit down!(무릎 꿇어!)"

아니다. 이건 그냥 앉으란 얘기잖아. 다시 "Get down!" 어째 좀 이상하다. 이 자들이 엎드리네.

무릎을 꿇려야 하는데… 그렇다면, "Knee… down!"

서울 용산경찰서 이태원 지구대의 이동혁(28) 순경. 지역 특성상 외국인이 많아 영어 몇 마디는 필수다. 지금은 제법 유창하게 '폴리스 영어'를 구사하지만, 그도 처음엔 '집 나온 영어'를 고생시켰다. 외국인 범죄자를 처음 붙잡아 무릎을 꿇리려 주워 섬긴 영어들을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단다. 그 때만 해도 'Stand on your knee'를 몰랐다.

"대학 시절만 해도 영어 실력이 형편 없었죠. 미국인이 'vegetarian'(채식주의자)이라고 몇 번씩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고서는, 제딴엔 선심 쓴다고 갈빗집에 데려갈 정도였으니까요."

이 순경은 용산경찰서 내에서 손꼽히는 영어 고수로 범행을 부인하는 외국인을 때론 어르고 윽박질러 척척 자백을 받아낸다.

"해외 연수를 다녀왔냐고요? 여권도 없어요."

그가 영어에 매달린 건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대학 3학년 때부터. 취직을 위해서였다. 일단 학교 근처 어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곤 친구로 지내자고 강사를 꾀었다. 채식주의자임에도 갈빗집에 끌려갔던 바로 그 사람이다.

"영화도 같이 보고, 농구도 함께 하는 식으로 붙어다니면서 계속 영어로 지껄였죠."

"밥 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고 수업 듣는 시간 빼고는 영어에 매달렸다"고 했다. 3년이 지나자 토익 점수가 945점까지 나왔다.

직장은 경찰을 택했다. 지난해 9월이었다. 연줄이 작용하지 않는, 실력으로 겨룰 수 있는 직장이라고 판단했단다. 아버지가 경찰이었던 것도 일부 작용했다. 근무지는 미군기지와 이태원이 딸린 용산경찰서를 지원했다. 나름대로 영어에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처음엔 좌절감부터 맛봐야 했다. 외국인이 전화로 교통사고 신고를 했는데 다른 경찰서 관할이었다.

"우리 관할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데서 콱 막히더군요. 뭐라 그랬는지 기억도 안나요. 저쪽에서 끊더군요."

그것만이 아니었다. 체포할 때 혐의를 밝혀야 하는데,'점유이탈물횡령''강도예비'를 영어로 뭐라 해야 하는지….

새로운 공부 시작. 경찰에서 펴낸 수사 관련 문구.용어 집을 외워댔다. 욕을 퍼붓는 범죄자들에게 맞서려고 인터넷에서 영어 욕도 찾아 익혔다. 그러나 품위상 아직 써 보지는 않았다고. 요즘은 경찰 영어 외에 일반 관광영어도 공부하고 있다.

"관광 안내를 부탁하든, 여권을 잃어버려 어려움을 호소하든, 한국 경찰은 유창한 영어로 척척 해결해준다는 얘기가 퍼지면 더 많은 관광객이 오지 않을까요."

글=권혁주 기자<woongj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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