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여당 개혁속도 조절론, 옳은 인식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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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나라당이 이해찬 국무총리의 사과를 계기로 등원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파행 국회가 정상 기능을 회복하게 됐다. 이제 '수구 꼴통'이니 '친북.반미세력'이니 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에 불을 지르고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언어폭력을 자제하고 각종 법안과 내년도 예산안을 차분하게 심의할 때다. 이 시점에서 우려되는 것은 열린우리당이 4대 법안 처리에 매달려 국회를 또다시 이념대립의 장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4대 법안이 얼마만큼 민감한지는 호칭에서 알 수 있다. 여당은 '4대 개혁 법안'이라고 부르지만 한나라당은 '4대 국론 분열 법안'이라고 한다. 국민도 이 법안을 둘러싸고 편이 갈려 있다. 지지와 반대 집회가 연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립학교법과 언론관계법 개정을 놓고는 위헌 논란이 일고 있다. 처리시한을 못박아 놓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최근 여당 내에서 4대 법안 처리 연기론이 꾸준히 제기되는 건 고무적이다. 이부영 의장도 어제 열린우리당 창당 1주년을 맞아 "산이 높으면 좀 돌아가고 물이 깊으면 좀 얕은 곳을 골라 건너자"면서 "너무 느리게 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유있게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는 현 상황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처방이다. "우리가 과반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라면 야당도 120석 넘게 지지받은 정치세력이란 점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한 발언을 잊지 않는다면 상생(相生)의 정치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4대 법안을 무조건 외면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있고 과반 의석을 가진 여당이 추진하려는 정책을 모조리 백지화하겠다는 건 억지나 다름없다.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은 뒤 국민을 설득해야 할 것 아닌가. 4대 법안 중 여야가 접근 가능한 것이 있다면 합의로 처리하고, 위헌 소지가 있거나 상호 간 거리가 먼 법안은 이번 회기를 넘기는 것이 옳다. 그 법안들을 붙잡고 씨름해봐야 또 대립만 부각된다. 그 대신 민생법안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순리다. 4대 법안은 여론이 무르익을 때 처리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