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변협의 '법치 후퇴' 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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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한변호사협회(회장 鄭在憲)가 23일 전국 변호사대회를 열고 "현 정부의 개혁이 실질적 법치주의에서 현저하게 후퇴했다" 는 결의문을 채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결의내용 중에는 현 정부 개혁정책에 대한 전례없는 강한 어조의 비판이 많아 정치적 파문이 일고 있다.

변협 결의문 가운데 "정부의 개혁 조치가 목표와 명분을 내세워 법적 절차에 있어서 합법성과 정당성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음" 을 우려하고 힘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에 의한 개혁을 촉구한 점은 가장 주목할 부분이다.

이와 함께 변호사들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헌법과 법률의 이론과 법체계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졸속입법은 국가와 사회에 엄청난 혼란과 비용부담을 초래하므로 위헌적 법률의 제정 방지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의했다.

언뜻 봐서는 구체적 사례 열거가 없는 원칙론적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 정책에 견주어 보면 변협의 이같은 결의는 대단히 의미심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한변협은 전국 변호사 5천1백명 모두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재야 법조계의 대표성을 지닌 단체다. 그러므로 변협 결의는 부분적으로 성향이 비슷한 변호사들끼리 모여 만든 단체가 내온 종전의 일방적인 목소리와는 성격이나 비중이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치는 민주주의의 흔들릴 수 없는 근간(根幹)이다. 이 시점에 법률전문가인 변호사들이 한 목소리로 "정부의 개혁이 실질적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진행되기를 갈망한다" 고 입을 모은 것은 결국 정부의 개혁 추진이 법치의 틀을 벗어났다는 지적에 다름아니다.

어느 때보다 강조해온 현 정부의 법치주의가 법률전문가들에 의해 불신임당한 셈이다. 특히 "개혁을 위해 필요한 법절차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발상은 극히 위험하다" 는 변협회장의 지적은 지나쳐 들을 얘기가 아니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당한 법집행을 방해하거나 확정되지도 않은 재판을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면서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등 법치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태가 일어나고 있다" 고 한 최종영(崔鍾泳)대법원장의 '축사' 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결 내용을 여론몰이식으로 비난하는 최근의 그릇된 사회 행태에 대한 사법부 수장(首長)의 경종으로 해석된다. 사법권 독립은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못지 않게 여론으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정치권이 변협 결의나 심포지엄 발표 내용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특히 민주당이 '대통령 탄핵' '직무정지' 등의 낱말에 매달려 흥분하고 반발하는 모습은 본질을 외면하는 처사다. 또 변협 주장에 편승해 탄핵 운운하는 한나라당도 정신 못차리기는 마찬가지다.

변협 주장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정부에 대한 충고다. 왜 이처럼 법률가들이 현 정권의 개혁정책에 대해 전례없이 강한 비판의 소리를 냈는지를 정부.여당이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 더 급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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