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소년, 백발 되었구나 … 박노수 그림 인생 55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박노수 작 ‘류하(柳下)’, 97X179㎝, 1970년대 중반, 화선지에 수묵담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군청색 비가 내리는 것 같다. 공백(空白) 가운데 소년 하나가 오도카니 서있다. 푸르다 못해 서러운 기색이 도는 풍광이다. 남정(藍丁) 박노수(83·사진)씨에게 인생은 남빛보다 더 짙은 군청 세상 속 한 인간이 마주한 고독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덕수궁미술관은 그림에 바친 한 인간의 55년 삶을 군청색 바다와 소년으로 요약하고 있다. 1945년 열여덟에 청전 이상범(1897~1972) 문하에 들어간 소년은 자라지 않는 아이처럼 자신의 그림 속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고 나오지 않았다. 소년 또는 ‘고사(高士)’는 앉거나, 서거나, 피리를 불거나, 먼 곳을 바라보거나 속세를 끊는 절진(絶塵)의 태도를 보여준다. 무엇이 화가를 이런 자화상으로 만들었을까.

10일 오후, 서울 옥인동 고가 정원에서 박노수씨가 화실로 썼던 2층 방을 안내하는 화가의 부인 장신애(손가락 치켜든 이)씨와 탐방 프로그램 참가객들. [정재숙 선임기자]

10일 오후, 작가의 작업 산실을 볼 수 있는 드문 자리가 열렸다. 덕수궁미술관(www.moca.go.kr)이 교육프로그램으로 기획한 ‘박노수 고가(古家) 및 작업실 탐방’에는 의외로 200명이 넘는 일반인이 신청했으나 20명만이 이날 현장에 참가할 수 있었다.

2003년 1월 쓰러진 뒤 7년째 병석에 누워있는 작가를 대신해 부인 장신애(68)씨가 손님들을 맞았다. 화가가 1982년 마련한 서울 부암동 396번지 화실에서 시작해 현재 살고 있는 서울 옥인동 168의 2번지 집까지, 2시간여에 걸친 짧은 탐방은 어렴풋하게나마 한 작가의 그림세계를 그려볼 수 있게 해주었다.

“부암동 산꼭대기에 홀로 들어앉아 산 보고, 꽃 보고, 텃밭 가꾸고, 그러고 사셨어요. 그림 그리다가도 누가 부르는 듯 황급히 달려 나가 잡초 뽑고 돌 고르다가 또 급히 들어와 붓을 잡곤 하셨죠. 돌을 좋아해서 집채 만한 정원석을 들이고, 수석(壽石)을 늘 옆에 두었어요.”

부인 장씨 설명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니 그림 속 소년과 고사가 늘 기대앉아있던 잘 생긴 바위들이 다시 보였다. “매화에 취해서 방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거나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옥인동 고가에서 난초 키우느라 문을 닫아걸고 살았다”는 얘기 속에 군청색 그림 바다가 새삼 느꺼워졌다. 장씨는 “2004년 잠깐 건강이 좋아졌을 때 마당에 심은 매화는 저렇게 화사하게 꽃을 피웠는데 선생님은 안 일어나시네요”라고 말끝을 흐렸다.

박노수 회고전 ‘봄을 기다리는 소년’은 18일까지 이어진다. 02-2188-6000.

글, 사진=정재숙 선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