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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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찬호(1959~) '촛불' 전문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
나는 어두운 계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
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손 안에 촛불이 켜졌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



'파랗게 언 손''헐벗음'과 같은 현실적인 삶의 결여가 강하면 강할수록 시인의 내면은 더욱 강력하게 상상력을 압박한다. 그 압박의 강도가 비어 있는 어두운 손 안에서 촛불이 켜지게 하고 팔이 양초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손에 켜진 촛불은 시인의 내면에서 재구성된 현실이다. 그 촛불 속에 언 손과 헐벗음과 가난의 생생한 기억이 있기에 촛불의 뜨거움은 마술이 아니라 미적 전율을 일으키는 것이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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