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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미국식 개혁, 한계도 알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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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 역사상 가장 시행착오적인 개혁은 금주법이었다. 1920년에 세워진 금주법은 술의 제조.유통.판매를 금지했는데, 이것은 여성 투표권이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실시한 것과 때를 같이해서 나타난다. 여성 투표권 운동은 거의 1세기 동안 계속되다 그제야 빛을 본 것이다. 그 환희가 오죽했겠는가? 여성 개혁가들은 새롭게 거머쥔 투표권의 위세를 몰아 금주운동으로 힘차게 나아가 드디어 헌법까지 개정했다. 이들 대부분은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뿌리를 갖고 있었다. 원래 미국문화의 밑바탕이 되었던 청교도들은 엄격한 생활태도에서 인간의 구원을 찾으려 했기에 술을 즐기지 않았다. 금주운동가는 미국의 음주문화도 이민이 들여온 부패상이라고 여기며 법을 세워 '술 마시는 못된 버릇'을 단번에 고치려 했다. 남성 대부분이 금주법을 좋아할 리야 있었겠는가, 그러나 정치인들은 갑자기 투표인구의 반을 차지하게 된 여성의 위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금주법은 개혁의 만용

이렇게 단순한 개혁마인드로 태어난 금주법의 폐단은 곧 처절히 드러났고 13년 후에 부랴부랴 폐지되었으나 미국인의 음주습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알 카포네 같은 악명 높은 갱단은 자동차에 기관총까지 장착하며 자기 밀주구역 관리를 위해서라면 대낮의 노상 총격전도 불사했다. 술을 끊을 수 없던 남자들은 불법 바에서 계속 마셔대다 거기서 파는 독주에 길들여져 미국은 '하룻밤 새에 하드 리커를 마시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캘리포니아에서 나름대로 발전하던 와인산업은 금주법으로 심한 타격을 받아 1960년대 이후 재기하기까지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이것이 미국에서 개혁적 만용의 대표격이라면, 미국의 제도가 우리나라의 개혁에 오용된 대표적 사례로는 선거인단제도가 있다. 유신시대에는 대통령 선출권을 국민으로부터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세워 간접선거를 했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이 미국의 선거인단제도였다. 미국도 선거인단으로 간접선거를 하면서 확고한 민주주의를 수립했는데 우리라고 그런 것을 못할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오도된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선거인단은 주민이 직접선거로 투표한 결과를 반영하여 누구를 대통령으로 지지하느냐가 차후에 정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번 대선의 투표용지에는 부시나 케리의 이름이 나왔지 선거인단은 거명되지 않았다. 우리가 예전에 보았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라는 선거인단만 거명된 슬픈 투표용지와는 다른 것이다.

유신 때 선거인단제 오용

미국의 뉴딜은 세계에서 모든 개혁지향 정치인들의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YS 집권 초기의 100일 개혁이 그랬고, DJ 시대는 물론 지금도 뉴딜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뉴딜을 따라 한다는 개혁치고 뉴딜만큼 역사에 족적을 남긴 것은 별로 없다.

요즈음 시민참여 사법개혁의 청사진이 나왔다. 영.미식 배심제와 독일식 참심제를 절충한다고 한다. 관권의 남용을 시민이 막으려는 의도에서 수립된 배심원제도에는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13세기 영국에서 발달한 배심제도는 그 배심원을 어떤 사람으로 뽑느냐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일곱살짜리 아이의 눈을 검은 띠로 가린 채 배심원을 뽑는 회의장 앞으로 인도해 나아가게 하여 재판관할권 주민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넣은 통에 손을 넣게 하여 여러 명의 배심원을 뽑았다. 배심원의 인선이 무작위로 엄격하게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연고주의가 강하고 정치이념의 대결이 불꽃 튀듯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배심원 선출이 진정 무작위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

김형인 한국외대 교수.미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