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가장 듣고 싶은 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5공이 막 시작되고 나서 기관 사람들이 쫙 풀려 경제가 좋아지는 아이디어가 없느냐고 묻고 다닌 적이 있다. 그때 경제가 매우 안 좋았는데 전 정권의 후유증이 겹쳐 정치적.사회적 불안이 아주 심할 때였다. "경제를 아이디어로 풀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바로 경제를 살리는 아이디어"라고 대답했다가 다소 시비가 붙은 기억이 있다.

아이디어로 경제난 풀 수 있나

요즘도 경제가 그때와 비슷하게 안 좋다. 그래서 경제를 살릴 아이디어를 열심히 찾는다는 소리가 들린다. 경제가 안 좋은 것은 하루 이틀에 시작된 것도 아니고 오래 된 후유증 탓도 크다. 그것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원인이 어디에 있건 경제난을 풀어야 할 책무는 현 정권에 있다. 그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미 정책이나 기술적으로 풀어야 할 단계는 아니다. 본원적인 접근과 치유가 필요하다.

첫째, 겸손함으로 풀어야 한다. 그동안 경제에 대해 오만했다. 경제는 그야말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데 너무 거칠었던 것이다. 경제는 장기적으로 경제논리에 의해 움직이므로 정성을 다해 키워야 한다. 좋은 경제는 로또 복권 같이 줍는 것이 아니라 길게 보고 만드는 것이다. 세심한 주의와 안전운행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과속과 급정거는 금물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걸 부인했을 뿐 아니라 음모로 보기까지 했다. 지금도 자신 있다는 장담과 거창한 꿈만 있을 뿐 구체적 실행방안이 안 보인다. 가슴 졸이며 상황을 파악하고 널리 의견을 들어야 길이 보일 것이다. 경제를 경시하는 줄도 모르고 경시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경제의 오묘한 이치에 순응하고 경륜 있는 전문가를 존중하며 경제를 세미나나 토론이 아닌 선택과 결단으로 풀려 할 때 경제는 좋아질 것이다. 모두 겸손해야 가능한 일이다.

둘째, 당당함으로 풀어야 한다. 당당함이란 밖으로 나타내는 투쟁정신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와 내공을 말한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당당함과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 또 리스크를 지고 결단을 해야 한다. 요즘 장군의 자리에 있으면서 졸병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 남의 탓 하기, 편 가르기, 결단 미루기 등이 대표적이다. 높은 자리에 앉았을 땐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먹여 살릴 책무를 통감해야 한다. 적대세력과 드잡이를 하여 나라가 불안해도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장군 의식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라면 먹으며 투쟁한 경험이 있다. 웬만한 고생쯤 겁나지 않는다"는 말들을 더러 듣는데 지금 라면 먹이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가.

5공 초 전두환 장군조차 "막상 권력을 잡으니 광화문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을 보고 이제 저 사람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나중에는 긴장이 풀어졌지만 처음엔 경제에 대한 겸손함이 있었다.

셋째, 공정함으로 풀어야 한다. 새 정부 들어 많은 것을 바꾸려고 하는데 그 방향이 무엇인지 모호한 것이 많다. 낡고 오래된 나라의 틀을 바꿔 살기 좋고 경쟁력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제대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적을 제압해 세력판도를 바꾸고 먼 장래를 위한 포석이 아닌가 하는 의구 때문이다. 사실 경제에 부담을 주고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무리와 조급함이 많다. 이러니 공명정대함을 의심받는 것이다. 근본 생각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일의 우선순위나 대소완급에 있어서 좀 더 공정함이 필요하다. 사심이 없음을 보여 줘야 한다. 대개혁을 위해서 경제쯤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그렇다.

겸손.당당.공정함으로 풀어야

이런 걸 그대로 두고 경제 아이디어를 아무리 모아본들 경제를 좋게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제 시행착오를 끝내고 민생문제 해결에 매진하자. 개혁은 경제회복과 경쟁력 있는 나라 만들기에 장애가 되는 것을 꾸준히 과감하게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일 것이다.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