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체니의 귀를 잡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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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 대선이 끝나자 한반도에 미칠 파장에 관한 얘기들이 무성하다. 급기야 우리 외교진용을 바꿔야 한다는 정치권의 습관성 넋두리까지 나온다. 본질과 무관하게 엉뚱한 얘기나 늘어놓는 이들은 아직도 부시의 재선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부시는 대외정책의 성공 덕분에 재선된 게 아니다. 또 경제여건이 과거보다 나아져 재신임받은 것도 아니다. 부시의 미국은 우리가 간여할 수 없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재선된 부시의 대북정책이 달라질 것이라든가, 한.미동맹에 변화가 올 것이란 예측에는 북한이나 한반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자기 중심적인 착각이 깔려 있다. "우리의 전략적 가치가 대단하다"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재선된 부시의 대외정책은 큰 변화 없이, 그리고 여전히 단선적이며 독단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대북정책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북핵 해결을 위해 제의했고 또 겉으론 집착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6자회담조차 워싱턴은 애초 이렇다 할 그림을 갖고 시작한 게 아니다. 북한의 주변 5개국이 공동으로 평양을 압박하자는 구상이 6자회담이다. 그런 마당에 미국이 쉽사리 북한과 마주 앉을 것이라고 예측하긴 힘들다. 게다가 대미관계의 안정적 관리를 중시하는 중국은 어느 정도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올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결국 부시에겐 북핵 해결을 서둘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미국이 가장 신경 쓰는 핵물질 수출로 북한이 미국의 코털을 건드린다면 나름대로 응징방안이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이제 남북한이 상대할 미국은 지난 몇 년 사이에 그토록 달라져버린 나라다.

이 와중에 우리 정치권에는 미국 공화당과 줄이 닿는다고 설쳐대는 철부지들이 있다. 이제 촌티를 벗을 때도 됐다. 반세기 넘는 동맹관계에서 아직도 미국 대통령이나 측근들의 귀를 잡을 수 있는 창구 하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동맹관리에 방만했다. 동맹을 향해 "할 말은 좀 하는 편"이란 지도자부터가 그랬다.

차제에 몇 가지 정리하고 넘어가자. 첫째, 재선에 성공한 부시가 북한에 아량을 베풀며 유연한 정책을 구사할 것으로 기대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북한체제와 김정일에 대한 부시의 증오는 변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6자회담 살리기에 주력하되 눈치 없이 북.미 양자 간 대화와 협상을 부추기는 잘못을 범해선 안 된다. 그건 워싱턴이 알아서 할 일이다.

둘째, 경험에 비춰 북핵 해법은 '위에서 아래로'식의 시도가 유효하다. 그렇다면 딕 체니 부통령의 귀를 잡아야 한다. 부시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은 체니 부통령의 몫이다. 부시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철저한 2인자 역을 자임하는 체니이기에 그에 대한 부시의 신임은 탄탄하다. 그런 체니의 손에 미국의 대북정책이 달려 있고 북한의 장래는 체니의 결정에 크게 좌우된다. 그래서 체니의 귀를 잡을 수 있는 전략을 짜야 한다. 체니-김정일 간의 평양 고위급 회담이 북핵해결과 북.미관계의 장래에 획기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게 그 전제다.

체니의 귀를 잡을 수 있는 인물은 그의 부담없는 측근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또 체니에겐 이런 말을 전달해야 한다. "북.미 고위급 회담은 북한 회유책이 아니라 보다 단호하고 위험이 따를 선택을 감행하기에 앞서 미국 입장을 북측 최고지도자에게 통보하고 평양의 마지막 결단을 촉구하는 최후통첩의 자리"라고. 그래도 북측이 움직이지 않으면 유엔 안보리 상정이든, 대북제재든 국제사회의 지지와 동참을 얻어내기가 수월해질 것이란 논리까지 전달해야 한다. 법석대지 말고 하나만이라도 분명히 실천해 보자.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워싱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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