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 칼럼] 분열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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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자유민주주의는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다양성은 공존할 수 있는 다양성, 조화될 수 있는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가장 좋은 민주국가는 다양성이 존중되면서도 국가 목표에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하는 '통합의 정치' 가 실현되는 경우일 것이다.

***다양성·통합 모두 후퇴

다양성과 통합의 결합이 가장 이상적이긴 하나 현실적으론 때에 따라, 나라에 따라 강조점이 바뀌기도 한다. 예컨대 평시에는 다양성에 더 비중을 두었다가 국가 비상시엔 통합 쪽에 비중이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조점의 차이여야지 어느 한 쪽이 완전히 무시되면 그 나라는 이미 자유민주주의가 아니거나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닐 것이다.

이런 다양성과 통합이란 기준에서 보면 최선은 다양성과 통합이 조화되는 경우고, 최악은 그 반대로 획일주의가 심화되면서 국민이 분열되는 경우다. 그 사이에 다양성과 통합 중 어느 한 쪽이 불균형적으로 강조되는 여러 콤비네이션이 자리잡는다.

독재로 지칭되는 1987년 이전 우리나라 체제에선 다양성이 위축되고 국민통합이 유난히 강조됐다. 두 기준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으니 최선이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라를 세우고 경제를 일으키는 데 국민의 에너지를 모으는 통합을 이룩했으니 최악도 아니었다. 민주화는 바로 이 위축됐던 다양성을 회복해 최선의 민주국가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민주화가 진전됐다는 87년 이후 그렇게 됐는가. 6.29선언 이후 우리사회의 다양성이 증대된 건 사실이다. 이념적으로도 눌려 있었던 급진까지를 포함한 진보의 목소리가 커졌고, 노(勞)의 힘과 각종 사회적 소수파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이와 함께 불행히도 지역주의의 표면화 등으로 통합이 후퇴하고 분열이 점점 깊어져 간 것도 사실이다.

영.호남의 대립은 71년 대통령선거 때도 이미 나타난 것이지만 80년 광주의 유혈사태를 거쳐 87년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그후 우리나라의 각종 선거결과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지역주의였다. 그동안 피해의식이 컸던 호남출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집권 후에도 이 분열적인 지역대립은 더욱 심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분열을 재촉하는 게 어디 지역주의뿐인가. 공존.조화에 익숙하지 못한 다양성의 진전, 분할통치로 이득을 보려는 정치권의 책략 등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그중 눈에 두드러진 경우 중 하나가 지금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

대통령이 언론개혁을 거론한 뒤 국세청과 공정거래위가 모든 중앙 언론사에 대한 전례없이 강도 높은 조사를 통해 5천3백억원대의 추징.과징금을 물리고 6개 신문사의 법인과 사주.임원을 검찰에 고발하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져도 한국 언론은 방송과 신문, 신문과 신문이 서로 삿대질만 하고 있다.

공화당 때도 권력의 압력에 눌려 신문발행인 26명 중 20명이 정부의 언론윤리위원회법 제정에 동조했지만 저항한 6개 신문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심으로는 그들의 투쟁에 박수를 보냈다. 정부의 직접 영향 아래 있는 언론사 소속원들도 마음은 한가지였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할 측면도 있다. 추구하는 이념이 다른 언론사도 있고, 신문사 간에 이해관계가 부닥치기도 한다. 또 세무조사 결과 도덕적으로 도저히 두둔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드러난 경우도 있다.

***권력 편에 선 일부 언론

그렇더라도 권력의 대 언론 총공격에 언론이 공동 대응은커녕 분열돼 권력 편을 들거나 서로 싸우는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부 영향 아래 있는 방송과 일부 신문이야 으레 그렇다 치고 민영 신문마저 남의 불행은 내 행복이라는 단견에 빠져 권력의 언론 공격을 내 몰라라 해도 괜찮은 것인가. 정권이 바뀐 후나 더 오랜 세월이 흘러 역사적 관점에서 되돌아봐도 과연 떳떳하게 행동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지역감정 격화와 언론간 대립에서 보듯 우리 사회에선 지금 분열의 도미노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득을 위해선 국민분열마저 마다않는 '분열의 정치' 에 큰 책임이 있다. 혹자는 우리 사회에서 민중주의의 세력화로 과거와는 또 다른 다양성의 훼손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는 다양성과 통합이 어우러진 '좋은 민주국가' 란 목표에 다가서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멀어지고 있는 것일까. 국민들이 엄중히 판단하고 심판할 몫이다.

성병욱 <본사 고문.고려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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