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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말 바꾸고 네티즌은 음모론 ‘불신의 바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해 백령도 해상에서 천안함이 침몰한 지 4일로 열흘째. 대한민국 전체가 천안함 침몰 사건을 둘러싸고 혼돈에 빠졌다. 정부와 군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는 높고 인터넷상에는 유언비어와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 ‘의혹’ ‘오리무중’ ‘은폐’ ‘ 논란’ 같은 단어들이 언어의 세계를 이끌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1일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한국인들은 국가를 괴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부와 국민 간 소통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양극화된 민주 국가에서 한국 정부는 앞으로도 뒤틀린 음모론과 정부를 신뢰하기를 거부하는 대중의 큰 저항으로 시달릴 것”이라고 했다. 불과 한 달 전 우리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등을 예로 들며 “한국은 이제 변방국가가 아니다”고 예찬했던 FT다. 천안함 사건이라는 미증유의 대형 재난, 그것도 안보 재난과 마주한 우리 정부와 군, 언론, 시민 사회가 바깥사회에 비친 모습이다.

9·11, 카트리나 때 미국과 비교돼
“이제 나올 원인은 다 나왔다. UFO(미확인 비행물체)의 소행이란 주장만 남았다.” 한 네티즌이 올린 글이다. 회사원 김모씨는 “도대체 천안함의 진실이 뭐냐. 이렇게 혼란스러울 수 있느냐. 정부도 언론도 이젠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외교안보 관련 인사들은 “정부와 군이 위기 대응 매뉴얼을 갖고 그에 따라 행동했는지는 모르지만 허둥대고 말을 바꾸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고 했다. 실종자 구조 및 사고 수습을 위해 사건 발생 초기 가용 자원을 다 동원한 것 같지도 않고 실종자(구조자 포함) 선원 가족을 보듬는 데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27일 TV에는 실종 군인 가족들이 평택 해군 제2함대 사령부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고 군인들을 밀쳐내는 모습이 방영됐다. 외국에선 보기 힘든 일이다. 이 과정에서 출동한 지원 병력이 가족들을 향해 총을 겨눈 게 논란이 됐다. 함장이 제대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진상은 별개로, 가족들은 함장이 탄 차를 쫓아가며 발로 차기도 했다. 군의 1차적 대응이 허술했던 대표적 예다. 군은 가족에게 사건 발생 후 12시간이 지나서야 상황을 설명했다. 이미 언론에 보도가 넘쳐난 뒤다. 가족들의 슬픔이 분노로 변한 단초가 됐다. 육군 지원 부대를 위한 텐트를 설치하자 가족들이 벌써 “실종자들을 바다에 버려둔 채 장례 치를 준비를 한다”며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군·정부 차원의 사고 수습과 함께 군 지도부가 가장 먼저 챙겼어야 할 일이 전담 책임자를 배치해 가족을 위로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종자 가족들의 감정이 예민한 가운데 최원일 함장을 말끔한 차림으로 가족 앞에 내보낸 것과 관련, 정부 부처 내에선 “군이 너무 개념이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대언론 설명 과정에서도 불신이 증폭됐다. 언론 보도를 부인하다 시인하는 일이 잦았다. 정부 관계자는 “내부 정보가 취합되기도 전에 언론에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군은 열감시 장비(TOD) 촬영 기록도 편집한 분량만 공개한다고 했다가 여론이 들끓자 다시 전부를 공개했다. 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 의원(민주당)은 라디오에 출연, “스스로 발언을 번복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의혹을 자초하고 있다”며 “국가안보 사안인 만큼, 냉정한 자세로 판단을 해서 확립된 사실만 종합해 최종 발표를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국회의 대응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실종자 구조 및 사고 수습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김태영 국방장관을 불러놓고 되돌이표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물론 답답한 국민의 마음을 대변해 과실을 지적하고 원인을 알아낸다는 의도라고는 하지만 뒤에 해도 될 문제란 것이다. 국회 내 국방위원회가 사고 이튿날 생중계 질의를 한 데 이어 2일에는 여야 합동 긴급현안 질의가 열렸다. 이날 김 장관이 ‘어뢰 가능성’을 최초로 언급하긴 했지만, 사건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 공세가 판을 쳤다. “왜 장관이 실종자들을 물속에 방치하고 있느냐” 같은 자극적인 발언들이 쏟아졌다.

“대한민국 해군을 발가벗겨 놨다”
언론의 추측성 보도, 오보, ‘아니면 말고’ 식 보도도 지나쳤다는 지적이다. ‘선실에서 사망자’ 발견 등 추측 보도가 난무하자 실종자 가족들이 “확인되지 않은 보도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인하대 언론정보학과 하주용 교수는 “추측이나 첩보를 사실확인 없이 일단 머리기사로 보도한 다음 설명이 다르면 ‘의혹’으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말했다. 김태우 국방연구원 책임 연구원은 “사건 발생 초기 실종자가 살아 있느냐,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구하느냐에 초점을 뒀어야 하는데, 천안함의 재원, 사고 원인 추측에 몰입했다”며 경쟁 때문에 보도 순서가 바뀌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또 “언론이 대한민군 해군을 전 세계에 발가벗겨놨다”며 “국가 안보와 관련된 보도에서 자율 통제하는 상식과 메커니즘이 작동됐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국가안보 사건인데 사건 기사처럼 다뤄졌다는 것이다. 하주용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국가안보 관련 문제에 대해선 군·정부에 시간을 주고 보도를 스스로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과 정치권은 교신일지, 해군 지휘 계통 등 원자료를 공개하라고 군을 압박하고 있다. 필요한 경우 민간합동조사위원회가 열람하도록 하겠다는 군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국가안보의 영역, 전문가의 영역이 부정되는 상황이다.

‘현 정부 국면전환용’까지 나돌아
인터넷은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글도 있지만 군 경험자, 군사 매니어, 여기에 특정 정치적 편향성을 가진 이들이 쏟아내는 각종 음모론으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현 정부가 세종시와 4대 강 문제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국면 전환용으로 벌인 자작극이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북한 특수부대원(북한판 UDT)이 야간에 함정에 침투해 시한폭탄을 장착하고 바로 탈출했다. 특수요원은 1㎞ 정도 떨어진 백령도로 빠져나갔고 지금도 백령도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인간어뢰설이다. 또 “구타와 가혹행위 등에 시달린 후임병이 폭발물을 터뜨렸다”는 ‘해군판 김일병설’도 있고, “훈련도중 아군, 즉 속초함이 오인 사격해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아군 오폭설’도 퍼져 있다. 심지어 “천안함이 TV 공중파 신호를 잡으려고 이동하다 암초에 좌초됐기 때문에 군에서 사실대로 발표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도 회자된다. 모두 군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주장들이다.

회사원 전모씨는 “지방에 사는 지인이 음모론 가운데 너무 황당한 내용을 사실처럼 믿고 있어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하주용 교수는 “군이 언론에 계속 끌려가면서 정보를 공개해 ‘은폐기도’ 인상을 주는 데다, 대부분 신문 방송이 아니면 말고 식 보도를 계속하면서 정보 수용자들은 비공식 공간에서 만들어진 정보를 더 신뢰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의혹’이 지배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더 이상 추측하지 말고 천안함이 인양된 뒤 정확한 결과를 기다리자”고 하는 주장들은 나오기가 힘들다고 했다. 정당한 주장들이 소수 주장으로 여겨지면서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리는 ‘침묵의 나선형 모델’(독일의 여성 언론학자 노일레 노이만의 이론)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선 대형 국가안보 사건이나 재난 사고 발생 시 원인 규명이나 책임자 문책 등은 시간을 두고 냉철하게 지켜본다. 일의 순서는 희생자 구조, 사태 수습이 최우선이고 이후 원인 조사 및 책임자 문책으로 들어간다. 천안함 사건 이후 정부와 군이 잘못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한국 사회가 너무 조급하고 무리하게 결론을 내려는 경향이 있다는 자성론도 나온다. 한 외교 안보 분야 인사는 “우리는 사건이 생기면 흥분하고 책임 소재가 어딨느냐를 따진 다음 제대로 된 재발방지책을 마련하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송 의원은 “미국의 9·11 사건 때도 초당적 진상규명 국가위원회는 테러 발생 441일이 지난 2002년 11월 26일 활동을 시작했고 2004년 7월 보고서가 채택됐다”고 말했다. 2005년 8월 말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카트리나 재해 때도 최우선 순위는 구조와 사태 수습이었다. 20여 일이 지난 뒤 여야 합동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

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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