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준비된 유화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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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통령의 연이은 '답방' 언급과 북한측의 NLL 침범을 놓고 정치권에서 공방이 거세다. 주권과 나라 체면의 문제라고 따지는 강경론과 북한을 포용해 밝은 세계로 이끌려면 참고 양보해야 한다는 유화론 간의 대립으로 보인다.

이를 보고 있자니 60여년 전의 역사가 떠오른다. 1937년 5월부터 40년 4월까지 영국 총리를 지낸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the policy of appeasement)' 이 그것이다. 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불량국가' 인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에 일방적으로 양보하다 오히려 이들의 '간' 을 키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라는 화를 불렀다.

체임벌린은 이탈리아를 달래느라 에티오피아를 무단 점령한 행위를 38년 4월 16일 공식 인정했다. 아무리 무도한 일이라도 일단 벌여놓고 나중에 국제적 역학을 잘 이용해 협상하면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체임벌린은 이해 9월엔 나치당의 본거지인 독일 뮌헨에서 히틀러와 담판했다. 그는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와 함께 9월 30일 히틀러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는 내용의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북서부 주데텐 지방은 독일에 넘어갔다.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면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생각에 우방인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린 것이다.

체임벌린은 유화정책으로 전쟁을 막고 화합의 시대를 연 국민적 영웅이 됐다. 그는 '명예로운 평화' '우리 시대의 평화' 를 열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유화정책을 펴는 영국과 프랑스를 만만하게 보고 이듬해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9월에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의 막을 올렸다. 그래서 3천만명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됐다.

체임벌린은 아랍 우화인 '어리석은 낙타 주인' 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야영하는 주인의 텐트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 낙타를 그냥 놔둔 주인이 결국 야금야금 들어오는 낙타에 밀려 밖으로 밀려나 얼어 죽었다는 우화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어리석은 지도자는 아니었다. 유화정책은 실패했지만 전쟁준비는 훌륭히 했기 때문이다. 그는 뮌헨에서 돌아오자마자 군비강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자 미련없이 유화정책을 포기했다. 두번 속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징병제를 실시했다. 영국이 개전도 하기 전에 병력을 소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병력과 무기를 충분히 준비했기에 영국은 독일군의 공중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고 상륙을 원천봉쇄했다. 체임벌린은 39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이듬해 4월 자신을 줄곧 비판해왔던 윈스턴 처칠에게 전시내각을 물려줄 때까지 총리로 재임하며 전쟁 초반부를 지휘했다. 그는 전투에는 실패했지만 경계에는 성공한 것이다.

체임벌린은 유화정책을 하더라도 대비할 것은 대비한, '준비된 유화정책' 을 폈다. 그리고 정책이 잘못됐다는 판단이 서면 과거의 실수를 변명하려 들지 않고 미련없이 바꾸는 결단력을 보였다. 그러기에 그의 이름은 아직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대북 강경책과 유화책 중 어떤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 대비하며 사태를 주도해야 한다는 점에선 이견이 별로 없을 것이다.

채인택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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